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요셉성인과 아빠의 도움

by 가을 펭귄

불임을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 욕심 내지 않으면서 2년 정도를 아주 평화롭게 지냈다.


더 이상 기적도 기대하지 않고 가임기를 쿨하게 넘겼다.

하늘을 보지 않으니 별을 따지 못한다고 실망할 일이 없었다.


2024년 4월, 이제 내가 없어도 이혼할 생각이 없이 사이좋게 지내시는 부모님이

10년간의 독일생활을 향수병으로 마무리하고 귀국하셨다.

함께 지내던 시간들이 그립기는 했지만 부모님이 '역시 내 나라가 최고'라며 만족해하시고,

온갖 서류처리와 관공서, 병원을 동행할 일들이 없어지자

나만의 시간이 많아지고 자유로워졌다.

방학에 한국에 가면 나를 반가이 맞아줄 친정, 다시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사실도 기뻤다.


만사가 평안하고 학교일도 잘 되어가고 있는 시기에 다시 한번 유혹이 찾아왔다.


성당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요셉"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다.


멜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성가정의 수호성인인 요셉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도 체험담등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였다.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불치병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부부가 요셉 성인께 기도를 해서 완치되고, 아이가 생긴 사례가 초반부터 소개되었다.


'뭐야, 이게 무슨 다큐멘터리지 영화야... 웬 초반부터 불임부부 얘기야... 저 사람들에겐 기적이 일어날 운명이었나 보네... 우린 다른 케이스야... 난 이제 쿨해... 저런 거에 안 흔들려...' 생각했다.


그런데 잊을만할 때쯤 비슷한 다음 사례가 소개되고, 후반부에 임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결된... 우리와 아주 비슷한 처지의 부부가 축구팀처럼 많은 아이를 낳은 사례가 소개되자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지 말고 우리도 다시 시도해 보란 얘기일까?...'


무적의 리타성녀가 간구해도 안되었을 때는 우리에게 아이가 아닌 다른 걸 주시려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욕심 없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평온했던 마음이 다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해보라는 기도, 읽으라는 성경말씀, 이것저것 다해보고 내려놨는데...

불임을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래 걸렸는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소망해 볼까?'


'이것이 유혹일까? 운명일까?'


괜히 다시 소망했다가 실망하지 말고 며칠 더 마음을 지켜보자 마음먹었다.




며칠 후 나는 성물 판매소에서 '요셉성인께 드리는 9일 기도 책자'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사고 말았다.


큰 욕심 안 내더라도 '어디 리타성인보다 요셉성인이 더 대단한가 한번 보자'라는 호기심도 발동했던 것 같고...

잘 나가는 두 성인을 경쟁시켜보자는 객기도 발동했던 것 같고...

아무튼 나는 그 책자가 무슨 보물 단지인 것처럼 고이 모셔가지고 집에 가져왔다.


둘이 함께 기도를 드려볼까 생각도 했지만, 오랫동안 우리 부부를 힘들게 했던 '아이 갖기' 이슈를 다시 꺼내면 남편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책자를 숨기고 혼자서 9일 기도를 드렸다.


아무도 모르게

모든 게 우연인 것처럼 일을 치르고 싶었다...


남편에게 '이제 다 내려놓고 불임을 받아들이고 사니 평화롭고 행복하다'라고 몇 번이나 말해놓고

다시 번복한다는 게 쪽팔리기도 하고, 괜히 우리에게 예민한 이 문제를 다시 꺼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냥 아주 자연스럽게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그냥 그렇게 나 혼자 몰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꿈꾸어보자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 내 맘을 잘 모르겠고, 일을 저지를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또다시 실망할지도 몰라.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가로 실망과 자기 연민의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몰라. 이건 다 유혹일 수 있어. 아이가 없는 게 우리에게 좋다는 확신이 이미 여러 번 있었잖아...'


너무 오랜 세월을 실망하며 아파본 상처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는 않은지라

다시 실망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기가 두려워 망설이고 있을 때

한국에 계신 아빠가 꿈에 나왔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안색이 보랏빛이고 엄청 아프신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아빠가 젊으신 날에 우렁차게 부르시던 노래가 생각났다.

'아빠가 곧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그럼 아빠의 그 좋은 목소리를 더 이상 못 듣겠네... 그럼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이미 아빠를 잃은 듯, 건강하시던 아빠가 그리워 울면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며 한국에 계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강하시다. 다행이다...!

그날 우리는 거의 40분이나 통화를 했다.

별 얘기는 아니었다. 그냥 사는 얘기였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천천히 나누며 아빠가 너무 아프신 꿈을 꿔서 돌아가시면 어떡하냐 걱정을 했다고... 아빠 소싯적에 잘 부르시던 노래 한번 불러달라고 부탁을 해서 녹음을 했다.


"그래, 우리 딸이 소망하면 함 불러보지 뭐."

그리고 아빠는 곧바로 노래를 시작하셨다.


긴 밤 지새우며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대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항상 기운이 창창하실 때의 힘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맑고 좋은 음색으로 천천히 불러주시는 노래를 듣고,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올라와 '우와... 너무 좋다...'며 꺼이꺼이 우는 나에게


'거, 이 노래 안 부른 지 너무 오래돼서 부족하지만 잘 들어줘서 고맙다.'

라고 말씀하셨던 아빠...


큰 병도 없으신 아빠와 이 땅에서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떤 직감으로 알았는지, 나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그 긴 통화에서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애달파하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많이 얘기했다.

그때 녹음해 놓은 노래와 아빠의 목소리는 나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세상의 사람들과는 항상 다른 이야기를 해주셔서 가끔은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들이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랑해서 해주시는 말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어느새 아빠는 나의 최고의 멘토가 되어 있었다.


아빠가 언제까지 살아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그날,

나는 아무에게도 안 꺼낸 나의 최근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아빠, 내가 이제는 철이 들어서 그런지, 사실 요즘은 애 키우는 사람들 보면 너무 대단해 보이고, 힘들어 보여. 난 이제 그럴 힘도 없어...

이 나이에 아이를 갖는 것도 두렵긴 한데, 그래도 아직 내 생물학적 나이가 허락을 해줄 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소망을 해봐야 할까?

나 사실 맘 내려놓고 사니 마음은 평온해.

이제 다시 희망과 절망의 오르막길 내리막길 반복하기도 싫고...

애가 없어서 홀가분하고 좋은 것도 있으니까 마음 접은 거 그냥 화끈하게 내려놓는 게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에이 모르겠다..." 하고 운을 띄었다.


그러자 아빠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건 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나이가 허락되는 한 일부러 꿈을 접을 필욘 없지.

하늘이 허락하셔서 생명을 주시면 감사하게 받으면 되지.

아이를 키우는 게 참 힘들기도 하지만, 아빠는 너희가 있어서 참 행복하다.

네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돌보아 줄 자식이 없으면 그것도 쉽지 않지..."

라는 말을 급하게 쏟아내셨다.


원래 차분~~ 히 말씀하시는 아빠의 빨라진 목소리에서

'괜찮다, 받아들이고 살면 된다'라고 여태까지 말씀해 주시긴 했지만

그래도 포기를 하신 적은 없었는지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

나의 깊은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셨던 마음,

내 노후를 걱정하시는 마음을 읽었다.


솔직히 내 노후가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는데

아빠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게 올라왔다.


"아... 그런가?... 그러면...

그래도 나 아직 나이가 되니까 다시 시도해 볼까?"


"그럼, 그럼! 일부러 포기할 필요는 없어.

안되면 나중에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고...

아무리 힘들어도 다 키워진다..."


사랑하는 아빠가 나에게 해주시는 말들이 참 따뜻했다.


나도 포기하고 불임을 받아들였다지만 그건 머리에서 그런 거고

가슴으론 아직 그렇지 못했나 보다.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시는 아빠의 말씀에서 큰 사랑을 느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었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와 힘이 솟아올라왔다.


'그래... 그럼 한번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그렇게 나는 마지막으로 기적을 바라며 임신을 시도해 보기로

혼자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