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인 줄도 몰랐던 임신

by 가을 펭귄

나 혼자 임신할 계획을 세운 후 가임 확률이 100%라고 여겨지는 날을 계산해 두었다.

그리고 그날, 가장 좋은 타이밍에 남편과 함께 하늘을 보았다.


어떻게 아무 계산이 없는 듯 꼬셔야 하나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날은 마침 우리 둘 다 편안히 집에서 쉬는 날이었고,

남편이 함께 우리만의 시간을 보내자고 내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오... 하늘이 돕는다...!

아싸 땡큐...!'


내 맘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관계를 가진 후부터 곧바로 태교모드에 들어갔다.


이미 다 이루어진 것처럼...


증상 놀이는 워낙 많이 해봤지만 이번엔 정말 관계 직후부터 뭔가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배에서부터 밑에까지 작은 실들이 연결되어 당기는 듯한 느낌... 뭔가 신비로운 일들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를 가진 후부터 일주일 동안, 이번엔 뭐가 정말 다르다는 걸 느끼며 임신 체험담 검색을 했다. 나처럼 관계직후부터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착상 전에 일어나는 변화를 사람이 느끼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남이 하는 말보다 내 느낌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때 유튜브에 "매우 예민한 사람 (Highly Sensitive Person)"에 대한 영상들이 많이 나올 때였다. HSP (초민감자) 테스트의 23개의 문항에 23개가 맞는 걸 보며 나의 느낌을 의심하지 말자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래, 나는 극초민감형 인간이야. 남이 못 느끼는 걸 나는 느낀 걸 수도 있어.

내가 혼자 착각하는 게 아니야. 이번엔 진짜 같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에 대한 방어기제가 발달해 있어서

'괜히 헛물켜지 말자'는 생각도 공존했다.

그리고 그 방어기제와 내 몸을 사리지 않고 남을 돕고자 하는 나의 습관은 '나의 느낌을 의심하지 말자'는 새로운 깨달음보다 강했다.


관계 후 일주일 동안 증상놀이를 하며 '이번엔 뭔가 다르다'라고 느끼고 있을 때쯤 눈이 많이 왔다.

성당에서 어르신들이 미끄러지지 않으시도록 젊은이들이 마당을 썰자는 얘기가 나오자, 나도 얼른 큰 삽을 들고 합류했다.


제설, 제설, 삽을 들고서

제설, 제설, 넉가래로 밀어...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공군 레미제라블 '레밀리터러블'의 제설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엔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고 신난다 뛰어들었는데, 커다랗고 무거운 눈삽으로 너른 마당의 눈을 치우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고되었다.


한편으로는

'임신이면 이렇게 무리하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내가 빠지면 나머지 두 명이 이걸 언제 다 치우나 싶기도 하고...

'15년 동안 아무리 빌고 기도해도 안 생겼는데 이번이라고 뭐 별 수 있겠어? 또 혼자 착각이지...' 싶기도 했다.


그런 두 마음이 팽팽하게 공존하는 가운데,

기대했다 실망하기 싫고

쿨한 척하고 싶은 마음이 이겨서

나는 힘들게 오랫동안 눈을 치웠다.


2025년 2월, 학교에 합창단을 만드느라 매우 고군분투하던 시기였다.

준비할 건 많고 사람은 없고. 연주걱정이 앞섰다.

악보들을 창단멤버들의 수준에 맞게 쉽게 편곡하고 지휘를 연습하고 연주를 기획하고 하는 과정에 스트레스도 많았다.


'그래도 뭐 임신이 될 운명이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그렇게 쿨한 척을 하며 밤늦게 까지 영혼을 갈아 넣어 일을 했다.





그 다음다음 날, 눈 덮인 조용한 휴일에 휴식을 취하다가 속옷에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은 분홍빛 점 몇 개가 묻어있는 걸 발견했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모든 임신 극초기 증상을 다 겪어봤지만 이건 처음이었다.

인터넷 폭풍검색 결과 '착상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관계 후 10일 지날 때쯤 착상혈이라는 게 비칠 수 있다고 했다. 시기도 딱 맞다.


역시 요셉성인이 대단하다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기 시작했다.

이건 나의 심리적 착각이 아니고 물리적 확증이다.

'우와... 드디어 나도 임신을?'

매일매일 임신 극초기 증상을 검색하며 증상놀이에 제대로 빠져들었다.


한편으론 갱년기 증상이 아닌가 솔직히 두렵기도 했다.

갱년기엔 생리가 빨라질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다고 하기에...

이것이 생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빠른 테스트기로는 관계 후 10일부터도 임신확인이 된다기에 다음날 바로 임테기로 테스트를 했다.

젠장... 두 줄이 아니었다.


착상이 되었어도 아직 임신호르몬(hCG) 분비 수치가 적어 음성으로 나올 수 있으니 2-3일 후에 다시 테스트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다음날 마음을 편히 갖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러면서 흔히 보던 생리혈 같은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아... 생리였구나... 그래...

이번에도 임신은 아니었어...'


생리주기가 28-29일인데 24일째에 시작한 생리였다.

'갱년기인가?'

갱년기가 오면 생리가 갑자기 빨라지기도 한다던데...


임신이 아니란 실망에

벌써 갱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겹쳐졌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일상을 시작했다.




다른 때보다 생리통이 심하고 컨디션이 무척 좋지 않았다.

학교에 병가를 내고 싶었지만 각종 시험과 합창단 첫 모임 등 중요한 일정들이 있어서 빠지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고 에너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몸살도 아니고 생리통인데 뭐...

생리통약을 두배로 먹고 커피를 마시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학교로 향했다.


일주일 정도 생리를 하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갱년기가 시작돼서 생리 주기가 뒤죽박죽이 된 건가 싶었다.

갱년기 검사를 받아보고 싶어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내 설명을 들으시고, 몇 가지 검사를 하신 후 말씀하셨다.


"갱년기는 전혀 아니에요.

일주일 전에 있었던 출혈이 자연유산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배가 심하게 아팠던 거고,

지금 나오는 게 생리입니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관계 후 열흘째였으니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안 나올 수도 있다고 하셨다.

지금 와서 100%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오랜 임상 경험으로 보아
임신과 자연유산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다.



'임신인 줄도 몰랐는데 유산이라고?

그럼...

내가 임신을 해보긴 한 거야?'


여러 가지 질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데 슬픔보다는 신기했다.

결혼 14년 만에 임신이 한번 되기는 되어봤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요셉성인 짱이라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정말 한 번만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정말 잠깐 갖게만 해주셨네?


약간 성인들의 유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뭐야. 진짜 갖게는 해주셨는데 낳지는 못하게 해 주셨네...

내 인생에 아기는 정말 없나 보다...




처음엔 임신이 되긴 되었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좋다가, 결국엔 아니었다는 생각이 강해지자 상실감, 우울감, 죄책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눈이 푹 쌓인 성당 마당에서 큰 삽을 들고 눈을 치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임신이면 무리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삽을 내려놓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이보다 학교일이 더 중요했던 나도 원망스러웠다.

배가 그렇게 아프고 다리가 무거웠는데도

그 몸을 끌고 학교에 갔던 내가 가장 원망스러웠다.


의사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은 태어날 아기였으면 그 정도는 버텨냈어야 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자책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었다. 그래도 마음은 무거웠다.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고 아이와 소통했다가 잃은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어땠을까...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 몸이

한번 임신해 본 몸이라는 사실로

감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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