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면 없는 대로

지혜의 말씀들

by 가을 펭귄

임신이 한번 되었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나에게도 그렇고 남편에게도 그렇고

그동안 수그리고 눌려있던 어깨를 어느 정도 펴게 해 주었다.


우리에게 단 한번 일어났던 기적적인 임신은 한편으론 감사와 치유였고,

한편으론 미련의 시작이었다.


정말 마지막이다 하며 기적을 소망해 보았고,

그 기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아이를 낳는 것이 정말 우리의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라고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자꾸만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인가? 다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면서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또다시 말려들어갔다.


난임과 불임의 긴 터널에는

형광등 밝은 탄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희망, 때로는 절망

때로는 잊어버림, 때로는 오매불망

때로는 초연, 때로는 미련

어둡고 구불구불한 굴곡과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있다.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이제 우리도 임신이 되는구나' 하고 기대하며 가임기에 맞춰 관계를 하고

왠지 임신인 것 같이 몸이 힘들기에 기대했는데 아침에 테스트를 해보니 아니었다.

실망이 컸다.

오랜만에 다시 깊은 우울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긴 통화를 한 후 아빠에겐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우리는 아주 가끔 쌓아놓은 깊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이지, 일상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엄마에게만 얘기를 했었는데 내가 깊은 우울에 빠져있다는 걸 들으셨는지 아빠에게서 갑자기 문자가 왔다.


'우리 딸 잘 지나고 있지요?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는 길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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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그날 아침 속상해서 울고 있었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연락이 왔다.

직접 찍으신 꽃 사진과 함께.

꽃을 사랑하시는 아빠가 아름다운 꽃과 함께 내 맘을 위로하고자 보내신 것임을 난 안다.


아예 안된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살 땐 맘 편했는데 기대하다 실망하니 더 힘들다고,

어렸을 때부터 오페라가수보다 선생님보다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여자로서 엄마가 되어보지 못하는 것은 참 고통인 것 같다고 답문을 보냈다.


아빠는 다른 긴 말 없이 시 같은 짧은 글을 보내주셨다.


세상일은 기다림이다

하늘이 점지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도 지혜이다


인생 별거 아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삶도 소중하다


그리고 며칠 후에 어느 스님의 시와 음악이 담긴 동영상을 보내주셨다.



없으면 없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냥 그런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려고 애쓰고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애쓰고

불편한 것을

못 참아 애쓰고 살지만

때로는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또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사는 것이

참 좋을 때가 있습니다.

(...)


자꾸 채우려고 하니

비웠을 때

오는 행복을

못 느껴봐서 그렇지

없이 살고, 부족한 대로,

불편한 대로 살면

그 속에

더 큰 행복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광스님,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중 (일부 발췌) -


아빠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받은 좋은 글이 담긴 동영상들을 소중히 모아두셨다가 내게 그때그때 필요한 내용을 보내주시곤 했다.



아빠는 너무나 수재였지만, 운명의 흐름 속에서 그 재능에 걸맞은 길을 걷지는 못하셨다.

병원에서 방사선사로 일하시며 의사들 밑에서 근무하셨지만,

항상 겸손하고 빛나는 분이셨다고 모든 직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게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종종 그 삶을 떠올리게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오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런 아빠를 사랑하기에

그 말씀은 내게 큰 울림이 되었다.


이틀 뒤 나는 덕분에 마음이 많이 나아졌다고 문자를 보냈고 아빠는


'그래 고맙다.

마음 잘 다듬고 건강히 지내다오.'


라고 답을 주셨다.

그리고 20일 후에 나의 사랑하는 아빠는 갑작스런 사고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항상 진리와 깊은 것을 추구하셨던 아빠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부모님이 불교셔서 지혜의 말씀엔 어디에도 열려있으셨고

항상 이 편 저 편 가르지 말고, 중간에 서서 잘 바라보며 양쪽 의견을 다 들어보고 신중히 판단하라고 하셨다.


아빠는 돈으로 많은 것을 남겨주시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많이 남겨주셨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될 말씀과 보화들을...




없으면 없는 대로 받아들이며 살라는 이 간단한 말씀이 '이것을 해봐라, 저것을 해봐라...' 하는 얘기보다 훨씬 깊고 힘이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고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기오테라피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역설적 의도' (Paradoxe Intention)와도 닿아 있어 내게는 더욱 진리로 여겨진다. 빅토르 프랑클은 인간이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긍정마인드로 다 잘 될 거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병과 죽음과 절망에 반항하기 위해 그것을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것도 역설적으로 큰 힘이 된다.


인간은 자유와 평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가 가진 재산을 다 버리거나 목숨을 희생하기도 한다. 두려움과 절망을 이기고 자유로움과 평화를 갖기 위해 질병을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 정신의 고유한 능력이다.


예수님도 '생명을 잃으려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에는 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답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것,

내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이어진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정답이었다.


절망에 반항하기 위해,

아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자 불임의 긴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