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두번 째 난임 판정
공부에 매달렸을 때 공부만 하고 산 건 아니다.
가끔 친구들도 만나고, 동생이 있는 인도네시아에도 잠시 다녀왔다.
동생이 셋째를 낳았다. 아들 둘에 이어 딸이었다.
엄마와 외할머니를 닮아 첫째와 둘째를 진통 시작 후 너무 오래 걸리지 않고 쑴풍쑴풍 잘 낳은 동생은 셋째도 금방 잘 낳았다.
착한 동생과 제부를 닮아, 말 잘 듣고 키우기 쉬운(?) 아들 둘을 가진 동생은 아기를 낳은 일이 자기가 세상에서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라고 나에게 늘 말했었다. 이제는 셋을 낳아 더 쭈글쭈글해지고 축 늘어진 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아무리 몸매가 이렇게 망가졌어도 엄마 마음 알아준다는 딸까지 낳았으니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동생은 나와 같이 성악을 전공했지만, 원하던 대학을 가지 못해 힘들어했었고, 우리 집의 경제사정이 넘 어려우니 둘 다 유학 가는 것은 힘들 것 같다며 음악을 포기하고 사회복지학과로 전과했다. 졸업과 함께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지만, 직장생활을 힘들어했다. 대학교 때 친구 소개로 만난 제부는 성공한 사업가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일구신 회사를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제부는 동생이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집에서 아이만 잘 키워주면 된다고 했고, 기사와 보모가 딸린 집의 사모님이 되게 해 주었다. 결혼과 함께 내가 그토록 원하던 현모양처가 된 동생이 나는 매우 부러웠다. 그렇지만 동생은 유학도 나오고, 하고 싶은 음악 공부를 마음껏 한 나를 부러워했다. 서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묘한 경쟁심과 부러움이 있었지만, 우리에겐 각자의 삶을 섭리로 받아들이는 깊은 신앙이 있었고, 우리는 그 경쟁심과 부러움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서로를 많이 사랑했다.
유학생활로 멀리 떨어져 지내며 조카들이 크는 모습을 가까이서 못 본 것이 너무 아쉬웠던 나는 공부하느라 바쁜 시간에 틈을 내어 동생을 찾아갔고, 그게 고마웠던 동생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힘들었을 내 마음을 섬세히 배려해 주면서, 아기띠를 업고 엄마 흉내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었다. 주변 친구들이 낳은 아기들을 안아보려 하거나 같이 놀아주려고 할 때, 아이들이 나를 밀어내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 아이들에게 다가갈 때면 늘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따랐는데 동생의 아이들은 달랐다. 내가 자기 엄마와 똑같이 생겼다며 나를 좋아하고 „이모, 이모“ 하며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기띠를 매고 유모차를 밀며 엄마 노릇을 하고, 자기 엄마와 너무 똑같다며 내게 착착 들러붙는 조카들을 돌보아주는 그 시간은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동생만이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이젠 첫째가 아니라 둘째, 셋째를 낳기 시작했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거나, 여기에 정착하며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대화의 주제가 주로 임신과 육아였다. 안타깝게 유산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난임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던 한 친구는 임신 초기 유산을 겪은 아픔 중에 눈물지으며, 내게 아이를 잃은 고통이 얼마나 큰 지 아냐며, 나처럼 못 가져본 게 차라리 나은 줄 알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 친구가 나의 고통이 어떤 건 줄 알까? 이렇게 오랜 시간 한 번도 못 가져본 내 마음도 엄청 아픈데…‘
그렇지만 내가 아이를 잃어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힘든지 상상이 안될지도 모른다. 친구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정답은 모른다. 친구는 분명 나에게 위로를 해주려고 그 말을 했을 텐데, 나는 그 말이 아팠다.
아이를 낳은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나는 꼭 아기용품점에 가서 아가옷을 샀다. 옷은 다들 물려받거나 선물 받아 많을 텐데 차라리 계속 필요한 기저귀 같은 게 더 실속 있는 선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항상 예쁜 아가옷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나는 어디에 아기용품 매장이 있고 어디에 좋은 제품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이대별로 어떤 크기를 골라야 하나 잘 몰라서 매장직원에게 매번 물어봐야 하긴 했지만, 한번 들어가면 유모차부터 장난감까지 모든 것을 다 관심 있게 둘러보았다. 나도 언젠가 여기 고객이 될지도 모르니까... 아가옷을 구경할 땐 ‚쪼그만 게 되게 비싸네… 돈 많이 벌어야겠네… 아니다… 동생이랑 아는 사람들이 많이 물려줄 거니까 조금만 사면돼…'라는 생각을 했다.
없는 형편에 참 이 친구 저 친구 아이 낳을 때마다 아가옷을 많이도 선물했다. 나도 나중에 다 돌려받을 거라는 계산을 하고 그렇게 아가옷들을 선물한 건 아니다. 그냥 좋아서 했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입혀봤으면 좋겠다 싶은 예쁜 옷들을 남들에게 선물하며 마음으로나마 대리만족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친구네 가면, 아가옷 선물로 관심과 감사를 받는 것은 잠시, 매 순간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은 어린 친구들 때문에 대화가 안 되었다. 나는 친구가 다과나 유아식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과 놀아주며 육아에 동참했다. 잠시 틈이 나면 친구들은 계속 육아와 아기 얘기만 했고 애가 징징거리면 '피곤해서 그런다'며 재우려고 했다. 그럼 나는 갑자기 방해꾼이 된 듯 나와야 하는 경험이 반복되었다. 나도 공부하느라 힘들고 할 말이 많은데 내 얘기는 하나도 못하고 대화 같은 대화는 하나도 못하고, 아이가 예쁘다며 웃고 맞장구만 쳐주다가 나오는 그 만남들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언제 나도 아이가 생겨 그런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어느덧 나는 아이가 있는 엄마들과의 만남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이가 없어서 대화가 되는 친한 친구들은 공부를 마치고 하나둘 귀국했다. 그러면서 내겐 또래의 한국 친구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새로오는 유학생들은 너무 어리고 아직 독어가 안되어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해 내 시간을 많이 뺏으면서, 다른 도시에 학교가 붙으면 곧 떠날 사람들이었다. 내 나이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낳고 자모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 번은 그쪽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가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얼렁 아이 만들어서 들어와~~“라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안 만들고 싶어서 안 만드나…‘
그러니 나이 또래별로 모이는 한국인 사회에서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어르신들과의 만남도 점차 어려워졌다. 어르신들께로부턴 오지랖이 넘치는 관심들로 이런저런 호기심 어린 질문과 코멘트들을 듣게 되었는데 각자는 궁금함과 관심으로 참다 참다 나에게 한 번 물어본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그 여러명의 한 번이 여러 번이 되는 것이었다. 이젠 웃으며 일부러 오버해서 밝은 척할 기운도 없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한인성당 가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슬픈 해프닝이 벌어졌다.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인 독일의 어머니의 날에 미사가 끝나고 어머니들에게 장미꽃을 주는 풍습이 있는데 어느 자매님이 실수로 나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주셨다가 "아니다! 자기는 엄마가 아니지!" 하고 도로 빼앗으신 것이다. 그분의 작은 실수는 나에게 역대급의 큰 상처를 남겼다.
"아니다! 자기는 엄마가 아니지!"라는 힘찬 목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그 목소리와 함께 얼떨결에 받았던 장미꽃이 내 손에서 '훅~!' 하고 빠져나간 그 멋쩍은 느낌, 허전함, '내가 왜 괜히 그걸 덥석 받아가지고... 왜 그걸 받고 잠시라도 좋아했을까... 내가 왜...'라는 후회와 창피함, 서글픔, '그 자매님은 왜 그걸 또 굳이 뺏어가지고... 장미가 충분히 많았는데...'라는 원망이 뒤섞여 집에 오는 내내 흐느꼈다. 집에 와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며칠 내내 그 소리가 내 귀에 맴돌았다. 그 후로 나는 주일이나마 나가던 한인성당에서 완전히 발을 끊었다.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나를 돌보기 위해.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발을 끊을 생각은 아니었던 나는 독일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친해졌다 하면 한국으로 떠나버릴 친구들이 아닌, 여기에 남을 현지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거기에서 청년모임에 나가면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나이가 나보다 10살쯤 어린데도 같은 신앙 아래 금방 친해졌고, 다들 나처럼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육아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늦깎이 대학생이다 보니 관심사가 비슷해서 좋았다.
가끔 미사반주로 봉사를 하다 보니 6살짜리 아이가 있으신 분이 자녀의 피아노 레슨을 부탁하셨다. 알바가 필요한 때여서 수락하고, 집에 가보니 동네가 너무 좋았다. 나는 집 구하기가 어려워 6년째 집을 찾고 있는데 이 동네가 맘에 든다고 이 주변에 집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보기엔 너무 수수한 이 아주머니가 자신이 이 아파트 10세대의 건물주라고 했다. 요즘 집 구하기 너무 어려운 것 아신다며 내년에 이사 나가는 집이 있다고, 방 3개짜리 집을 아주 저렴한 월세로 아들의 피아노선생인 나에게 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번번이 집 구하기에 실패하던 우리에게 독일성당 봉사를 하다가 갑자기 큰 빽이 생겼다. 말씀하신 그 시기는 내 공부가 다 끝나고 교사시보 들어가기 전의 아주 좋은 시기였다. 드디어 작디작은 신혼집에서 탈출할 희망이 생겼다. 공부가 다 끝나고 그 집에 이사를 가는 것이 아기가 생기는 데에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이 드니 지금 아이가 안 생기는 것도 다 뜻이 있는 것 같아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남편은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 무정자증의 원인을 찾기 위한 고된 검사들을 시작했다. 나에게 난임의 원인이 있다고 믿고 있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검사, 즉 전신마취로 복강 내 유착이 없는지, 난소, 자궁 주변에 이상이 없는지, 나팔관에 막힌 곳이 없는지 파란 물을 흘려보내 확인하는 복강경하 색소 유익검사까지 다 했던 걸 아는 남편은 자신에게도 모든 검사를 다 해봐야 할 차례가 왔음을 알고 있었다.
무정자증의 원인이 폐쇄성인지 비폐쇄성인지 확인하기 위해 하는 정관 사정관 조영술, 요도 조영술, 각종 엑스레이, 호르몬 검사 등이 시행되었다. 결과는 또 한 번 어마어마했다.
무정자증이 폐쇄성임을 확인해 주는 요도 협착증과 비폐쇄성일 가능성도 많음을 알려주는 호르몬 검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정자는 있는데 배출 통로가 좁아서 난임의 원인이 되는 폐쇄성 무정자증과,
고환에서부터 정자 생성이 안되거나 적기 때문에 난임의 원인이 되는 비폐쇄성 무정자증을 동시에 지닌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 남편이…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검사는 비폐쇄성의 정도 여부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고환 조직검사와 고환 정자 채취술이 남아있는데, 호르몬 수치가 이미 좋지 않을 결과를 말해주고 있다며, 시험관 시술을 할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통증도 크고 침습성도 있는 이 검사를 굳이 추천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요도협착증도 수술 시 고통과 재협착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소변이 어느 정도 나오고, 통증과 합병증이 없으면 건드리지 않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말씀하셨다. 남편이 소변을 볼 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빠가 소변보실 때 나던 우렁찬 소리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우리 난임의 원인이 될 거라곤 생각을 못했었다. 하긴 그것 만이 문제가 아니고 아예 생성자체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결과도 나와버렸지만…
그 아프다는 마지막 검사까지 다 해볼까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나와 남편은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시험관 시술까지 다 해볼 계획이면 당연히 해봐야겠지만, 둘 다 시험관 시술에 대한 생각이 없는데 지금 받은 더블로 확실한 난임선고로도 이미 충분히 아프다 생각했다.
우리는 이제 무정자증의 원인을 알아냈고, 시험관시술이 아니면 임신 가능성은 아주 적은 상태… 아니 불임으로 머무를 것이라는 것을 더 정확히 뼈 때리게 알아버렸다.
난 처음으로 입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입양절차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보았다. 아이를 키울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자격이 되는지 까다로운 심사가 진행된다고 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가 많고 절차적으로도 준비할 게 많아서 독일인 입양은 평균 8년이 걸리고,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것도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싫다고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극구 싫다고 했다. 자기 아이 아니면 못 키운다고 했다.
우리 남편은 착하지만 자기가 뭘 원하는지 항상 정확히 알고, 나와는 달리 '아니요'를 아주 잘하는 남자다. 나도 100프로 원하는 건 아니고 한번 생각해 본 거니까... 남편을 존경하는 맘으로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성경말씀에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제 목숨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섭섭하고 남편이 미워지려는 어려운 순간에 항상 그 말씀을 나침반처럼 따랐다.
그럼 우린 입양은 못하는 거다.
이제 정말 리타 성녀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우리의 불가능이 가능하게 전구 해달라고, 계속해서 매일매일 기도했다. 기도하고 희망하면 다시 나아졌다. 그래도 기댈 언덕이 있어서 살 수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마흔전에만 낳으면 돼... 이렇게 공부하느라 힘들 때 그리고 교사시보 시작해서 새로운 거 알아갈 때 생기는 거보다 교사시보 끝나도 서른여덟이니까... 그때도 늦지 않을 거야… 정교사가 되면 임신하자마자 곧바로 유급 휴가다... 나도 드디어 유급휴가라는 걸 받을 날이 올 거야... 그때 받는 게 낫지...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