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도 끝나고, 독일어 C2 시험도 끝나고 이젠 교사시보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
그때까지 3개월여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약속대로라면 이 시간에 내가 피아노를 가르치던 아이가 사는 좋은 동네로 이사를 했어야 하는데 나에게 약속을 해준 히메나 아주머니가 갑자기 더 급한 사정이 있는 가족을 세입자로 받아주시는 바람에 우리는 이사를 못하게 되었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 있는 시간에 문득 아빠와 단둘 이만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 만나면 분위기가 안 좋은 일이 많이 생기다 보니, 엄마랑 둘이만 만난 적이 많았다. 두 분은 평생 다른 곳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셨지만, 생각의 길이 달라서 많이 싸우셨다.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두 분의 불화를 되도록이면 숨기셨고,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시기 전에 우리를 늘 빨리 재우고, 가끔 만취한 모습의 아빠를 보고 우리가 걱정하거나 싫어할 때에도 아빠를 좋은 사람이라며 항상 커버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건강하고 자존감 있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는데, 내가 대학생이 되자마자 그동안 눌러놨던 아빠에 대한 울분을 나에게 다 털어놓으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대로라면 아빠는 정말 세상에 나쁜 놈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편을 들겠다고 아빠를 미워한 세월이 10여 년이었다.
그런데 외국에 나와 유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다 보니 왠지 아빠가 이해가 되고 불쌍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빚이 많아 쪼들리는 삶이었지만, 혼자 벌어서 가정을 책임지시느라 멀고 힘든 직장을 평생 근속하신 아버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말이 없는 아빠가 술이 취하면 갑자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놓으시는데, 그 말들이 옛날처럼 싫지 않았다. 커가면서 아빠를 미워했지만 어렸을 때 좋은 추억도 많기에...
우리가 어렸을 때 평일엔 맨날 늦게 들어오셔서 거의 못 뵈었지만 주말이면 우리를 데리고 산에, 영화관에, 놀이동산에, 그리고 그 당시에 참 이국적이고 세련된 공간이었던 케이에프씨와 돈가스 집에 데리고 가시며 항상 새롭고 좋은 것을 보여주려 노력하신 자상한 아빠였다.
옛날에 모든 걸 참던 착한 모습의 엄마와 달리, 눌러놨던 화를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엄마가 더 이상 불쌍하지 않고, 가만히 그 폭격을 다 맞고 있는 아빠가 불쌍해 보이고 측은했다. 아빠가 엄마에겐 나쁜 남편일지 몰라도 나에겐 좋은 아빠인데, 내가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다 보니, 만나게 되면 나에게 연락을 자주 하는 엄마와만 만나게 되고, 아빠는 소외시키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다. 이제 노래도 공부도 안 해도 되니 아빠가 좋아하시는 맥주도 함께 마시며 아빠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아빠가 연세도 있으시고, 엄마보다 몸이 불편하신 곳이 많으니 더 늦기 전에 아빠랑만 여행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내가 아빠를 미워하는 걸 원치 않으시고, 근본적으로는 아빠를 사랑하는 엄마는 잘 생각했다며, 아빠에게도 나와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아빠는 산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나는 독일중부의 하르츠 산맥 안 동화 같은 중세 분위기의 도시, '베르니게로데'라는 곳으로 아빠와 기차여행을 떠났다.
늘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으시고, 말이 없으신 아빠. 내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아빠. 칭찬보다 나를 단련시키려는 말을 더 많이 하셨던 아빠. 그래도 음악을 좋아하시고 문학을 좋아하셔서 입만 열었다 하면 시 같은 이야기가 터져 나오는 아빠를 난 좋아했다.
여행을 하며 2박 3일 동안 계속 붙어있게 되니 우리는 평생 처음으로 속 깊은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다. 우리의 속도대로 천천히...
말 느리게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함께 걷고 등산을 하며 우리는 모처럼 부녀의 끈끈한 사랑을 느꼈고, 서로에 대한 오해도 많이 풀고 화해를 했다.
아빠는 내가 진로에 대해 물어봐줬음 하고 늘 기다리셨다고 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고 내 맘대로 하길래 걱정을 하면서 지켜보셨다고... 나는 클래식 광인 아빠가 동생에게만 노래를 잘한다 칭찬하시고 나에게는 칭찬 한마디 안 해주시니 넘 섭섭했다고... 그래서 보란 듯이 잘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더니 아빠가 처음 듣는 얘기를 해주셨다.
"네가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고, 너무 예민한 아이가 무대에 서는 일이 많아지면 마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많아질까 봐 그랬어."라고...
유치원 때 재롱잔치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보고 '쟤가 날 닮아 감수성이 풍부하고 엄청 예민하구나. 저 나이 때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웃고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 딸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판단과 모든 걸 의식하고 있네... 무대에 서는 거 하면 상처받을 일 많이 생겨 안 되겠다.' 생각하고 엄마한테 애가 저런 걸 힘들어하는데 왜 억지로 시키냐고 뭐라 야단을 치셨다고 했다.
그리고 예술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후원이 많이 필요한데 아빠는 그럴 능력이 못되시니 내가 잘 사는 아이들과의 대결에서 힘들 것이 걱정되셨다고 했다. 너무 좋아서 아르바이트로 레슨비를 벌어가며 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어서 지켜보셨지만 맘껏 서포트해주지 못하시는 게 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고 하셨다.
그래도 내가 대학원 졸업을 할 때에는 그동안 내가 한 크고 작은 연주 팜플렛과 기사들을 순서대로 다 모은 스크랩북 파일을 슬그머니 건네주시던 아빠였다.
그런데 이제야 내가 내 길을 찾은 것 같아서 보기 좋다고 하셨다. 너는 화려한 무대에 서서 전 세계를 누비며 여기저기 많이 이동하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선생님 하는 게 더 잘 어울린다고. 그것도 너무 좋은 학교 말고, 그냥 보통학교, 혹은 시골학교 같은 데서 음악의 아름다움을 맛볼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 네가 가진 것들을 나눠주고 학생들과 가끔 연주하면서 부담 없이 노래하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고 하셨다. 노래를 할 때에는 듣지 못했던 응원을 받으니 참 좋았다.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빠는 일언반구 한번 하신 적이 없었다. 엄마를 통해 그냥 아이 낳기 어렵다는 병원의 진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계시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더 늦기 전에 뭘 해봐라 그런 말씀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그래서 이렇게 둘이만 여행을 와서 차분히 시간이 마련되어 있을 때 아빠에게도 자세히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아빠는, "그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또 받아들이며 살면 되는 거야."라고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그게 다였다.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뭉클했다. 다른 어떤 말보다 내 맘에 큰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이 흔히 하지 않는 말을 하는 아빠가 참 좋았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 하는 가장 대책 없는 이 말이 여태까지 사람들에게 무수히 들었던 어떤 실속 있는 코멘트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아빠가 내 맘 젤 잘 아네~? 정답이네~?" 하고 애교를 부렸고, 아빠는 "그래,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너 역시 내 딸이구나." 하며 피식 웃으셨다.
그리고 우린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지셨는지 "남편도 시험관 할 생각이 없대? 네가 아무리 싫다 해도 자기한테 원인이 있어서 그런 거면, 너를 사랑한다면 뭐를 해서라도 해주려는 노력을 해야지... 사내자식이 돼가지고 자기 아픈 거만 생각하고 희생할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하고 갑자기 내편을 들어주시며 물어보셨다. 더 이상의 검사를 할 생각이 없는 남편에게 조금이나마 섭섭했던 내 맘을 다 들여보시기라도 하시는 듯이...
나는 사실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내 맘을 다 들여다보고 알고 계신 아빠의 사랑이 참 고마웠다. 그래도 남편을 미워하시면 내 맘이 더 힘들 것 같아서, "어차피 시험관 안 할 거니까요...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요... 전 시험관 싫어요... 그리고 남편이 좀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거고, 저한테는 엄청 잘해주잖아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곧장 맞장구를 치신다.
"맞아... 그게 합리적이긴 해. 그래도 우리 사위 착해... 나는 우리 사위 참 좋아해. 우리 딸 결혼 잘했어...!"
아빠도 섭섭하셨으면서... 아빠 맘보다 내 맘을 더 살피시느라 그러셨겠지... 아니... 아빠는 그냥 마음이 넓고 지혜로운 사람이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안 계셔서 물어볼 수가 없다...
아... 난 왜 아빠 생각만 해도 이렇게 눈물이 날까...
아빠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나랑 제일 닮은 한 사람.
말이 없어도 인생으로 모든 걸 다 말하고 간 사람... 아빠에게서 난 참 많은 사랑과 위로와 가르침을 받았다.
아빠는 내가 남편에게 용돈을 타서 쓰는 걸 아시고는 내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공부를 하느라 수입이 불안정한 시기동안 본인의 얼마 되지 않는 생활비에서 늘 얼마씩 나의 주머니에 찔러주시곤 했다. 남들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나이에 아직도 못 이기는 척 받는 게 죄송했지만 우리는 말 안 해도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여행에서 아빠가 해주신 말씀 중에 두고두고 고마운 것은 꼭 집을 사라는 조언이었다. 독일에 와계시는 3년 동안 부동산시장과 경기를 파악하신 아빠는 "네가 이제 교사시보에 들어가게 되면 미래가 보장되는 직종이라 대출조건이 달라져서 신랑과 함께 대출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더 늦기 전에 빨리 집을 사라"라고 하셨다. 히메나 아줌마가 월세 주시기로 한 집이 무산되면서 이제는 진짜 교사가 되기까진 이사하긴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응원해 주시는 아빠의 조언 덕분에 갑자기 힘을 얻었다. 교사시보를 들어가기 전까지 남은 3개월 동안 집을 알아보고, 대출을 받아 드디어 시내에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다.
애들이 생기면 언젠간 이사 가야겠지만 둘이 살기에는 충분했다. 방이 세 개에 발코니도 크고, 리모델링돼서 세련된 집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전철역도 가깝고, 완전 시내에 있으면서도 조용한, 투자가치가 큰 집이었다.
그때 아빠와의 여행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이 집을 장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직후로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상승해서 돈이 있어도 집을 사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막차를 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는 내 삶의 꼭 필요한 시기에 각각 산신령같이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셨다. 엄마의 서포트가 아니었다면 또 한 번의 대학생활이 언제 끝났을지 모를 일이고, 아빠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내 집 장만이 과연 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이 세상 무엇에 비기랴...!
그렇게 우리는 7년 동안 살던 코딱지 같은 신혼집에서 드디어 탈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