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시보를 하는 동안 나는 많은 관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독일 교사시보 과정에서는 지도관들이 실제 수업에 반복적으로 들어와 수업을 관찰하고 평가한다.
멘토선생님은 시간이 될 때마다 자주 들어와서 코멘트를 해주시고, 거기에 교장선생님, 교육전반 세미나 지도관님, 각 과목 세미나 지도관님들이 정규 방문의 일정으로 총 12번이나 한꺼번에 들어오셨다.
한 학기에 4번인 정규 방문일이 오면, 수업 전에 10장짜리 수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교장선생님을 포함한 4명의 거대 군단이 수업 시작부터 끝까지 뒷줄에 앉아서 나와 아이들을 지켜본다. 내가 아이들이 어수선할 때나 돌발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아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 어떻게 수업을 이끌어가는지, 계획했던 학습목표가 눈에 띄는 결과로 나타나는지, 제출한 계획서와 비교하며 수시로 뭔가를 막 적으신다.
언제라도 탈락하거나 연수 기간 연장을 받을 수 있는 살벌한 시험대 앞에서 밤을 새워가며 준비에 또 준비를 했다.
그렇게 살 떨리게 진행한 수업이 끝나면 지도관님들 앞에서 내가 수업 중에 어떤 생각을 했으며, 결과에 대해 어떻게 분석하는지 발표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 수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는지, 어떤 점을 잘했고, 어떤 점이 아쉬운지 스스로 평가해서 일목요연하게 말씀드려야 한다. 그리고 나면 짧으면 30분, 길게는 1시간 정도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피드백이 쏟아지고, 그날 수업에 대한 점수가 나온다.
거의 매번, "수업 계획은 참 좋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고 아이들도 선생님에게 잘 협조하는 것 같습니다."라는 칭찬 두 가지로 시작해서,
"Aber, (그렇지만)..."
뭘 고쳐야 할지가 30개쯤 나오는 평가로 끝난다.
대부분 중간 가는 점수를 받았다. 좋은 점수가 나온 적도 딱 두 번 있었다. 어떤 때는 1점만 부족해도 탈락인 간당간당한 점수도 받았다.
매번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지만 용케도 살아남았다.
점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탈락만 아니면 너무나 행복했다.
교사 시보 4개월째,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신기한 종류의 통증을 얼굴과 머리에 느꼈다.
대상포진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내 얼굴을 보시자마자 얼마나 잠을 못 자고 일을 했으면 젊은 사람이 이렇게 되었냐고 "쯧쯧쯧...." 하시며, 2주는 푹 쉬어야 한다고 진단 소견서를 써주셨다.
얼굴 한쪽이 퉁퉁 붓고, 말할 때마다 웃을 때마다 얼굴이 욱신욱신 막 아픈데 학교와 세미나를 안 가도 된다니 살 것 같았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유급 병가였다. 2주를 쉬어도 월급이 그대로 나온단다.
아픈데 막 행복했다.
커피도 그 참에 잠시 끊어보고 많이 잤다. 젊은 나이어서 그런지 푹 쉬어주니 금방 회복이 되었다.
그렇게 된통 아프고 나서는 아무리 할 게 많아도 너무 무리하진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그날그날 넘어야 할 산이 커서 잘 지켜지진 않았지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 왔다.
예전에 나는 선생님들이 방학에 푹 쉬시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평상시에 시간에 쫓기며 수업준비와 공부를 했다면 방학엔 좀 여유로운 마음으로 수업준비와 공부를 할 수 있을 뿐, 나 같은 초짜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냥 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5학년부터 12학년까지 가르쳐야 할 내용을 거의 모르는 상태이니 그걸 다 수업해 보고 자료와 경험이 쌓일 때까지 공부의 끝이란 없는 것이었다.
남편과 여름에 휴가를 갔을 때도 나는 틈만 나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남편이 깨기 전에 숙소에서, 낮에는 해변가에서... 나도 휴가에 왔으니 당연히 쉬고 싶지만 뭘 알아야 수업이라는 걸 하지, 우리나라와 교과과정과 레퍼토리가 달라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아이들 앞에 서서 멀뚱멀뚱 서있기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게 공부하지 않고서는 아이들 앞에 섰을 때 가르칠 수 있는 지식과 자료가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에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신학공부에 매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교사시보를 하는 동안에도 난임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언젠가 기적이 일어나면 땡큐고, 지금은 하루하루 학교수업과 세미나에서 살아남는 게 관건이었다.
'이 힘든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할 수는 없어. 떨어지면 한 학기 연장인데, 안돼... 안돼...! 점수고 나발이고 무조건 붙어야 돼...'
모든 직장의 초년생들이 다 그렇겠지만, 매번 살 떨리는 수업방문을 자주 받아야 하는 교사시보는 정말 빡세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외국인인 나만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고, 독일인 동료들도 다들 힘들어했다. 뭘 해도 잘했다는 칭찬은 받기가 어렵고, 뭘 고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매번 아주 자세~~ 하게 설명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긴 하지만 지도관님마다 교육성향이 달라서 어떤 선생님껜 좋게 평가되는 게 어떤 선생님께는 안 좋게 평가되기도 하고, 뭘 해도 잘못했다는 지적을 여기저기서 돌려가며 받기가 참 좋은 시기다.
그때 같은 학교 젊은 음악선생님 중 한 명이 교사시보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였다고 힘든 거 안다고 토닥여 주었다. 제2차 국가 교원 시험만 끝나면 자기 스타일대로 자신을 갖고 수업하면 된다고, 힘을 내라고...
지금 학교같이 다니는 동료들도 교사시보는 자기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정말 그렇다. 그래서 가끔 학교에 교사 시보가 들어오면 '얼마나 힘들까...'싶어 마음을 쓴다.
그리고 다시 하라면 정말 못할 것 같다. 나보고 독일에서 선생님을 어떻게 하냐고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늘 하는 말이다.
"모르니까 시작했죠..."
아무것도 모르니까 용감했다고...
힘든 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 힘들기만 했다면, 나도 사람인데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은 반짝반짝하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어머 어떡해...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 ㅠ.ㅠ
순수 그 자체...
여러 가지 모양의 꽃들...
각각 다 아름다워.
행복하다...ㅠ.ㅠ
하느님 감사합니다...♡.♡
멘토 선생님 종교 수업에 청강을 하러 들어갔다가 5학년 아이들이 서로 발표시켜 달라고 손을 높게 높게 드는 모습, 그때의 표정에서 느껴진 순수함, 아이들의 발표하는 모습과 내용에 감동되어 청강노트 귀퉁이에 적어놓은 메모이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수업준비는 힘들었어도,
경험이 부족해서 아이들을 다루기는 어려웠어도,
아이들은 예뻤다.
그땐 수업 청강을 많이 들어갔는데, 수업의 부담 없이 맨 뒤에 앉아서 노련한 선생님들이 수업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아이들이 지도에 따라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내가 부족해서 나를 안 좋아하고 무시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에게 힘내라며 다정하게 다가와서 말을 걸고 좋아해 주는 천사 같은 아이들도 있었다. 자기네반이 좀 유별나다고 신경 쓰지 말라며 ㅋㅋㅋ
방학이 되면 너무 좋다가도, 방학이 끝나갈 무렵엔 신기하게 또 애들이 보고 싶었다. 병가가 끝나갈 때쯤도 마찬가지였다. 내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그 힘든 학교를 다시 가고 싶었다.
지금은 못하지만 언젠가는 잘하고 싶어졌다.
노래를 잘하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듯이 어느 정도 괜찮은 교사다 싶을 정도가 되려면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 시작이니까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지금부터 잘하길 원하고 절망하는 건 교만이라고...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고 희망해 보았다.
주관식 에세이형 시험의 장점도 알게 되었다.
객관식으로 점수만 봐도 대충 학습능력을 알 수는 있지만,
아이들이 천천히 오랫동안 쓴 글을 봐야 얼마나 수업시간에 진지하게 집중해서 듣고,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내는지 아이들 개개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수업시간에 손을 자주 들며 잠깐잠깐 말할 때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시험엔 아주 얄팍한 것만 적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업시간엔 조용했는데 내가 한 작은 말들까지 귀담아듣고 주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면 너무 대견하고 예쁘고, '내가 수업을 완전히 잘못하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내가 이래서 과연 제2차 국가 교원시험 통과 하겠는가, 월급은 얼마나 주나, 언어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교육부에 물어보러 간 적이 있다.
"제2차 국가 교원 시험은 떨어지면 한 번은 다시 볼 기회가 있다. 월급은 초봉이 생각보다 꽤 높다. 외국인 교사시보생들을 위한 언어 특별 코스가 있다. 거기에 가면 많은 도움을 받을 거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실제로 외국인 교사시보 연수생들을 위한 언어 특별 코스는 나와 상황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라, 교사로서 정확히 표현해야 하는 독일어에 대한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참가자들과 함께 어려운 점을 나누고 소통하는 일종의 자조모임(Self-help Group) 역할도 했다.
서로 실수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한바탕 깔깔 웃으며 앞으론 그러지 말자고, 좀만 더 버텨보자고,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고 서로 응원하고 나면 그렇게 힘이 났다.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 이외에도,
"선생님, 당신은 젊은 나이에 정상의 커리어를 하는 음악세계에서 와서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느끼는지, 너무 늦었다고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교사로서는 아직 젊어요. 아무리 늦어도 마흔 살 전에 교사가 됩니다. 그럼 최소 20년은 일할 수 있어요. 아직 늦은 게 아니에요. 시험만 통과하면 공무원이 되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이니.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 보세요."라는 격려를 받았다.
나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음악세계에서 소모품 같은 취급을 받다가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고 격려를 받으니 힘이 났다. 다시 맘을 잡고 끝까지 해보고 싶어졌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신학 공부를 하며 머리가 빠개졌던 것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기엔 투자한 노력과 시간이 너무 아까왔다.
포기하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냥 열심히 하는 게 답이었다.
"그래, 되든 안되든 끝까지 가보자!"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 포기하지 않겠다는 끈기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정규과정인 1년 반 만에 제2차 국가 교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지막 방문수업을 받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남편과 나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다. 교사시보 월급이 얼마 되지 않고, 돈 아낀다고 고급 레스토랑엔 절대 안 가는 우리인걸 아시는 아빠가 그 며칠 전에 나를 따로 찾아오셔서, 시험 끝나면 꼭 근사한 데 가서 맛있는 걸로 먹으라고 봉투에 돈을 가득 넣어주고 가셨다.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고 와인도 한잔하자 시키고 생전 안 시켜보던 비싼 음식들과 디저트도 시켰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너무 오랫동안 잠을 못 자고 하루 종일 긴장해 있다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눈이 퀭하고 힘이 없다.
그 한 장의 사진에 그동안 얼마나 거센 파도를 건너왔는지가 다 담겨있어서 지금 봐도 마음이 짠하다.
독일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은 외국인으로서 독일의 학교 시스템과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느라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크게 성장한 시간이었다.
교사시보가 끝난 시기는 2019년 1월. 첫 번째 난임판정을 받고 4년이 흐른 때였다.
우울 속에서 방황하다가 키프로스섬에서 우연히 리타성녀를 만나 기적이 일어나리란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고,
두 과목을 가르치는 정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 부전공 공부에 매진하고,
내 인생의 제일 큰 산, 교사시보 연수를 통과하며 그렇게 4년이 훌쩍 지나갔다.
자주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리타성녀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이쯤 되면 리타성녀에게 실망할 법도 한데...?
그런데 희한하게 나는 리타성녀가 고맙기만 했다.
지금도 리타성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 그저 고맙고 고맙다.
내가 버틸 수 있게 해 줘서... 그녀의 전구와 기적을 희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임판정을 받고 용기를 잃은 나에게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큰 힘이 되었다.
내 굽은 어깨를 꼿꼿이 당당히 세우고, 내 풀린 다리를 힘 있게 일으켜 세우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불가능도 가능하게 전구 해준다는 그렇게 강력한 성인의 전구에도 내 소망이 안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이가 없는 것이 나의 구원과 성화에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에...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시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리라 믿겼다.
나는 지금도 리타성녀를 많이 좋아한다.
아이가 없는데도 이렇게 좋아하는 건 아이가 없는 그 상태보다, 희망을 잃은 그 상태가 얼마나 더 힘든지를 알기 때문일 거다.
희망은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교장선생님도 음악부장 선생님도 나 자신도 과연 이룰 수 있을지 의심하던 독일에서의 교사의 꿈은,
언젠가 나도 잘해보고 싶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졌다. 이루어지니 참 좋았다.
작디작은 신혼집을 탈출하려고 오랫동안 집을 알아보고 헤맬 때,
히메나 아주머니가 좋은 집에 월세를 주시겠다고 해서 품고 있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희망 덕에 1년 넘게 편한 마음으로 지냈고, 놀라운 변수로 더 좋은 지역에 집을 사게 되었다.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나중에 더 좋았다.
리타성녀의 전구로 아이를 셋도 아니고 넷이나 낳고 현모양처로 살림만 하고 싶다는 꿈, 기적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희망 덕에 좌절하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살았고,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매 학기 100명이 넘는 젊고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사랑을 주는 마음의 어버이 같은 교사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지는 못했던 방법이었지만, 다른 방법으로 마음의 엄마가 되었다.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살 길이 열리고, 혹시 내가 희망한 것보다 더 많이 받은 건 아닌가 생각하는 날도 왔다.
내가 꿈꾸고 희망한 것이 "전부"라고 믿을 때, 내 인생이 거기에서 끝난다고 믿을 때, 희망은 "이루어져야만 좋은 것"이 된다.
그렇지만 내 삶이 한 지점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는 인식을 가질 때...
인간은 삶의 목적지인 영원한 선, 하느님을 향한 '순례자'라는 생각을 할 때, 희망은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항상 좋을 수밖에 없는 선'이 된다.
그러므로 희망은 인간에게 있어 좋은 것, 매우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