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의 판단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와 환난

by 가을 펭귄

2019년 2월, 모든 시험을 마치고 한국에 갔었다.

나는 독일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정식 교사가 되었다. 어느 국공립학교에서도 수업할 수 있고 공무원도 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친구들과 친척들을 만나며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대단하다고...


하루는 선배 부부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한 때 대학 기도 모임에서 봉사하며 깊은 영적 정서적 교류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 선배 부부는 독일에서 정식 교사가 되었다는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긴 했지만,

, 나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에겐 들어보지 못한 희한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 얼굴에 독기가 서려있다."


오랜만에 본 내 얼굴에 독기가 서려있어 놀랐다고,

내가 너무 독하게 살아서 아이가 안 생기는 거라며

내가 열등감으로 가득 차서

인정받으려고 너무 열심히 산 것 같다고 했다.

부모님의 불화와 갈등 사이에서

짓눌려있는 내 영혼에 치유가 필요해 보인다고

심리치료보다 더 깊은 영적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이게 웬 날 벼락? 난 잘 살고 있는데?

지금 독일에서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왔는데 내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엄마는 내 딸아이가 얼마나 자존감이 넘치는 아이인데 무슨 소리들 하시냐며

"얘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라고 하셨다.

선배들은 그때 그저 "예~그렇군요." 하고 말았지만 저녁에 나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엄마가 너 제일 잘 안다고 하실 때 너 가슴 답답했지?! 짓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라고 물었다.


혼란스러웠다.

이 선배들이 나를 더 잘 아는 건지, 엄마가 나를 더 잘 아는 건지,

나는 나 자신을 잘 아는 건지.

나는 누군지.


생각해 보니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춘기에 그런 질문을 하면서 '자아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걸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나는 사춘기를 겪은 적이 없었다.


항상 착하고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늘 긍정적이고, 친절하고,

남을 잘 돕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 있었던 '신사임당 상'이라는 표창까지 받는,

부모의 자랑이 되는 그런 아이였다.


선배가 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엄마가 너 제일 잘 안다고 하실 때 너 가슴 답답했지?! 짓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얘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라고 말씀하신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사실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 부모님과 함께 한국 방문을 했는데 넷이 한 집에서 지내면서 괴로운 나날이었다. 부모님의 신경전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싸움의 기운이 집안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가 있을 때 그러지 마시고, 두 분 문제는 두 분이 해결하셨음 좋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미안하다 하셨지만, 엄마는 내 맘을 몰라주고 화를 내셨다.


'날 제일 잘 알긴, 뭘 제일 잘 알아, 개뿔...'


내 얼굴에 독기가 서려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열등감에 꽉 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정받으려고 너무 독하게 살아서 아이가 안 생기는 거라는 말.

그 말이 마냥 섭섭하지가 않았다.

일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갈등으로 짓눌려 있는 내 영혼에 치유가 필요하다는 말,

심리치료보다 더 깊은 영적 치유가 필요하다는 말도.

무도 몰라주는 나의 아픔을 그들이 사랑의 시선으로 알아봐 준 것 같아 고마우면서 솔깃했다.


선배들은 자기네 기도모임에 나처럼 오랫동안 아이를 못 낳던 사람들이 영적 치료를 받고 아이가 생긴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사람들이 의학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들의 뿌리가 사실은 영적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면서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하다고... 그럼 너도 아이가 생길 거라고.

그런 영적 치유에 은사를 가진 분을 안다고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그토록 원하던 교사시보를 통과하고 이젠 당당하게 새로운 학교에서 일할 일만 남았는데

마음이 왜 이렇게 짓눌리는 기분이 드는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엄마는 아빠와의 갈등을 나에게 다 털어놓으셨고, 나는 그걸 다 들어드리며 아빠를 오랫동안 미워했다.

잘 키워놓은 두 딸이 모두 외국에 나가서 들어올 생각을 않자, 자식덕에 그나마 이어지고 있던 부부관계는 더욱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집에 살지만 남남처럼 대화를 안 하고 심지어는 별거를 하시고 이혼까지 고려하시는 상황이 왔다.

엄마는 아빠보고 같이 못살겠다고 나가달라 해놓고, 홀로 떠나는 아빠의 뒷모습이 너무 불쌍했다고... 미워도 헤어지는 건 힘들다고, 맨날 울며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빠는 엄마에게 큰 집을 내주고 한 여름에 푹푹 찌는 옥탑방에서 월세로 지내며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한 노고에 합당치 않은 비참한 노년을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겐 네 엄마가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런다며 아빠도 어쩔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다.


헤어지기엔 너무 서로를 사랑하고 신의와 책임감이 넘치지만 생각의 길이 달라 자꾸 부딪히는 두 분을 보며 나와 동생은 많이 괴로워했다.

독일이나 인도네시아로 두 분을 모셔서 우리라도 있어야 함께 사시지, 계속 한국에 두 분만 계시면 곧 못 견디고 이혼하실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단란하고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우리 가정이 깨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혼을 막아야겠다 결심했다.


합창단에서 벌어놓은 얼마 안 되는 돈을 탈탈 털어 두 분 비행기표를 선물했다. 독일로 여행을 오시라고 초대했다.

두 분은 독일을 참 좋아하셨다. 오셔서 우리와 함께 지내며 너무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민을 권유했고, 그렇게 두 분이 독일에 오시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서 적응하셔야 하니 두 분이 서로 의지하며 처음에는 잘 지내시는 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점차 적응을 하시자, 엄마는 그동안 쌓아놓았던 아빠에 대한 불만을, 한국에서보다 더욱더 강렬하게 표현하기 시작하셨다.


아빠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엄마를 경제적으로나마 평생 책임지겠다며 연금을 엄마 앞으로 다 바치고 용돈을 받아 쓰시는데 아무리 과거에 아빠가 어떤 잘못을 하셔서 마음에 상처가 생겼다 해도, 언젠가는 용서를 해야지 저렇게 평생 화를 내고 살건가, 엄마가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시집살이의 설움, 빚잔치의 설움... 이제 다 지나가지 않았는가...

이젠 괴롭히던 가족도 빚도 없는데 이렇게 자꾸 과거얘기만 하고 살건가...

비단 아빠를 만나 받게 된 상처만이 아닌 어린 시절 폭력 가정 속에 자라서 받은 상처까지 모두 아빠 탓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배운 폭력성까지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더 이상 엄마를 이해하기도 사랑하기도 어려웠다. 정년퇴직을 하여 시간이 많으신 아빠와 엄마를 독일에서 가까이 지켜보면서, 내가 여태까지 한쪽 말만 듣고 큰 잘못을 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 왔을 때, 엄마는 사위가 앞에 있는 데도 아빠 앞에서 언성을 높이셨다. 그리고 나에게 또 과거얘기와 아빠에 대한 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하셨다.

맨날 똑같은 얘기.

다 아는 30년 전 얘기...

더 이상 참고 듣기 어려웠다.


'제발 우리 앞에서 싸우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앞으로 엄마아빠의 문제는 엄마아빠의 문제이지 나에게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탁했다.


그 부탁을 엄마는 섭섭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는 왜 공감을 못해줘?!"


너한테 잘해주는 착한 남편 만나서 넌 내 맘을 모른다고.

내가 너한테도 얘기 못하면 독일에서 말도 안 통하는데, 좁은 한인사회에서 말할 데도 없고 그럼 어디 가서 얘기하냐고.

엄마가 얼마나 어려운 형편 속에 많은 걸 희생하며 널 키웠는데 넌 다 네가 잘나서 잘된 줄 아냐고.

넌 아이를 안 낳아봐서 죽었다 깨나도 엄마 맘 이해 못 할 거라고.


마음에 비수가 꽂혔다.

'넌 아이를 안 낳아봐서...'


엄마도 사랑하지만 아빠도 사랑하기에 두 분의 불화가 자식에겐 상처가 된다는 걸 모르는 엄마가 너무 답답했다.

나를 제일 잘 아신다면서 그런 내 힘든 맘들을 모른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선배들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부모님 문제로 짓눌려있고, 그래서 임신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모든 게 짓눌려 있는

'내 문제'로 여겨졌다.


우리 둘의 난임 원인은

'남편의 생물학적 문제'라고 의학적으로 진단이 두 번이나 정확히 났는데

난 왜 항상 다 내 잘못이라 생각하고 금방 선배들의 판단에 솔깃했는지...


사람을 너무 잘 믿고,

'내 탓이오'를 너무 잘하는 게 문제였다.


나는 그때부터 잘못된 죄책감과 정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왜 그랬는지, 그땐 뭐에 씐 듯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앞으로의 내용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도와준답시고 하는 말들과 판단이 얼마나 더 큰 아픔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마음 아픔 주의!



남편의 의학적 원인보다 더 먼저 존재하고 있었던,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씨앗...

나의 인성과 잘못들을 난임의 더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난임의 시간을 보내며 별별 비난과 코멘트를 다 들어보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희망 속에 잘 견디고 살고 있었는데...

믿었던 선배들의 섣부른 판단이 나를 또 다른 차원의 수렁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모든 문제의 원인 같았다.

나를 향한 단죄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다니던 멀쩡한 직장도 있었는데

교사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뭐가 잘났다고 이역만리 외국까지 와서 설치다가...

그래서 이런 벌을 받은 거야.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게 싫어서 독일로 도망 온 거야.

근데 몇 년 떨어져 살다 보니 그 힘든 걸 잊고, 다시 모셔왔어.

엄마아빠의 문제는 엄마아빠의 문제인데

왜 내가 다 끌어안으려고 해?

왜 내가 다 하려고 해?

그게 바로 교만이야.


내 나라를 팽개치고 여기 온 것도,

부모님에게서 교수님에게서 도망친 것도

다 내가 용서하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해서.

미워해서.

무시해서.


다 내가 잘못해서 벌 받는 거야.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되어 다 안다는 듯이...




선배들이 네 부모님이 너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해서 네가 아픈 거라고, 그래서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죽도록 공부하고 열심히 산거라고,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자,

나는 그 감당하기 어려웠던 무거움과 난임의 책임을 느닷없이 부모님께로 돌리면서 활화산같이 화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정작 실제 원인인 남편은 못 미워하고 이상한 데로 화가 다 튀었다.

나도 밉고, 다른 사람도 밉고, 다 미웠다.

우리 딸은 사춘기가 없었다며 자랑하고 다니던 엄마가, 착하다고 믿었던 딸의 분노에 놀라시기 시작했다.


불안, 우울감이 몰려오고 악몽을 꾸다가 손발이 저려 벌떡 깨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선배들이 소개해준 그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분과 독일에 돌아와서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분은 내가 어떤 고통을 겪어왔는지 다 안다며, 내가 부모님의 불화 때문에, 인정을 받으려고 착한 아이로 살고 죽도록 독하게 공부를 한 거라고 했다. 눌려있던 부정적인 감정들, 분노가 다 끄집어져 나와야 한다고 했다. 하고 싶으면 욕도 막 하라고 했다. 치료를 위해서 엄마와 여름에 한국에 한번 나오라고 강력히 권하셨다.


여름방학이 되자, 가기 싫다는 엄마를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둘이 함께 한국에 갔다. 매일 싸움이 계속되었다. 나의 눌러놨던 화를 다 분출해야 할 것 같았다. 평생 너무 착하기만 하던 큰 딸이 화를 내고 엄마에게 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기겁했다.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왔으니 명동에 가보자 나들이를 나갔다. 땡볕에 고생스레 많이 걸으며 하루 종일 엄마와 돌아다닌 그 여름날 저녁,

엄마는 다음날 받기로 한 영적치료인지 뭔지 받기 싫다고 안 가시겠다고 했다.


화가 났다. 엄마가 협조를 해줘야 내가 치유되고 아이도 생길 텐데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렇게 아픈 건 정상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영적치료에 함께 가지 못하겠다 해서 너무 속상하다고... 그런데 사람이 머리가 이렇게 아플 수 있는 거냐고...

치유의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신체적 증상도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좋은 일에는 원래 악의 방해가 많은 법이라고...그러니 걱정 말고 너무 아프면 두통약을 먹고 일단 쉬라고 했다.

나는 바보같이 그 말만 믿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괴로워하다가 어떻게 잠이 들었다.




새벽 두 시경 몸의 왼쪽 부분이 절이고 마비된 듯한 느낌과 함께 깨어났는데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다.

공황장애인 것 같았다.

엄마를 깨워서 도움을 청했다.

혀도 왼쪽 부위가 절이고 마비되는 것 같았다.


유학을 마치고 합창단 연주로 제네바에 갔을 때 콘서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 비슷한 증상이 온 적이 있었다. 갑자기 왼쪽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서 심장이 차가워지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왔다. 심장마비인 줄 알았다. 도와달라고 말하고 쓰러졌는데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동안 정신이 또랑또랑해져서 묻는 말에 대답을 다 했고, 병원에서 심전도검사를 했을 때 정상이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심리적'인 거라고... 스트레스성 공황장애라고 했다.


죽을 것 같아 병원에 가면 여러 가지 검사 후 아무 이상 없다는 얘기만 듣게 되어 창피하기 일쑤였다.

공황장애는 죽을 것 같지만 절대 안 죽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묵주기도를 했다. 죽지는 않는다지만 너무 무섭다고...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럼 얼마 후 그 끔찍한 순간이 지나갔다.


그래서 그때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묵주기도만 죽어라 외었다.

엄마가 무슨 일이냐며 괜찮아질 거라고 주물러 주시고, 얼마 안 되어 절인게 사라졌다.


그 새벽에 갑자기 똥이 마려웠다. 다시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했다. 화장실에 갔는데 왼쪽 윗부분이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어두웠다.

밤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또 여러 번 똥이 마려웠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밤을 보냈다.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로 몸이 긴장 흥분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두통은 점차 잦아들었다.


죽다 살았네...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납처럼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눈을 떴는데 천장의 왼쪽 윗부분이 안보였다.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날이 밝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이것도 치유의 한 과정일까?...


극한 상황에 오히려 침착해지는 나는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




이 이야기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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