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병을 얻다, 큰 가르침을 얻다.

by 가을 펭귄

죽다 살아난 다음 날 아침,

시야의 왼쪽 윗부분에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검은 커튼이 드리운 것처럼 안 보이는데,

안 보이던 부분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다시 보이고

그 상태에서 왼쪽 윗부분이 다시 안보였다.


내게 일어난 새로운 신체변화가 물리적 사실인지,

나의 착각인지, 아님 내가 내 왼쪽 눈썹을 예민하게 보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되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고, 여기저기 다시 쳐다봤다.


어떨 때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고, 어떨 때는 확실히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나의 신체적 자각에 확신이 없었다.


죽을 것 같던 공황장애도, 사실 심리적 원인으로 인한 신체적 착각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게 선배들이 말한 치유의 과정인가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성당에 갔다.

무거운 몸을 끌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빈 성당에 혼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마음은 편해졌고 몸에 기운도 조금씩 돌아왔지만, 왼쪽 윗부분이 어둡게 보이는 현상이 내 착각인지 진짜인지 계속 구분하기 어려웠다.

결국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과에 가서 검사를 했다. 망막 검사등 눈 속을 들여다보는 모든 검사를 한 후,

망막, 각막, 시력에는 모두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안과 선생님께서는 시야가 지속적으로 안 보이면 검사를 해야겠지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심리적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다.


그런가 보다 하며 독일에 와서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한국에서 마치지 못한 영적 치료와 상담을 이메일과 전화로 주고받으며 계속했다.

시야는 계속 제한되어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선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안과검사에서도 괜찮다 했으니 그냥 심리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곧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남편도 내가 한쪽이 잘 안 보인다니 걱정은 했지만

내가 자꾸 괜찮다니 그런가 보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야에 대한 말을 내가 자주 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 있었고,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가을이 되고 날이 짧아지자 시야의 검은 부분으로 인해 어두워진 주변이 더 어둡다고 느껴졌다.

오랜만에 친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시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친구가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다그쳤다.

한국에서 안과에 이미 다녀오긴 했지만, 여기서도 검사하면 나쁠 게 없겠다 싶어 병원에 진료 예약을 받았다.


내가 시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한국에서 받은 검사들을 이야기하자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한국에서는 안 했던 시야테스트를 진행하셨다.

동그란 원 모양 안에 불빛이 반짝일 때마다 버튼을 누르는 검사였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케이크 모양의 원판에 왼쪽 윗부분을, 4분의 1을 나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뇌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방사선과에서 MRI를 찍고 신경외과 선생님의 진료를 받으라는 진단의뢰서를 써주셨다.

추정하는 병명에는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의학 전문 용어들이 적혀있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뇌하수체 선종으로 인한 사분맹 (사분 시야결손)'이라는 뜻이었다.

악성종양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뇌에 종양이라는 게 있다는 데에 한 대 맞은 듯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도 있었다.

뇌하수체에 생긴 선종이 시신경을 누르는 경우 일시적인 시야결손이 나타날 수 있는데

수술로 그 선종을 제거하면 다시 볼 수 있다고 했다.


'수술을 하면 나을 수도 있다니 그래도 다행이다... 잘 될 거야...!'




각종 검사와 진단을 위해 2주간 병가를 받았다. 뇌하수체 선종인 경우 MRI뿐 아니라 호르몬 검사도 필요하고 여러 과의 협진이 필요한 문제라 이 병원, 저 병원을 오갔다.


MRI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대학 입시 결과를 기다리는 것보다 숨 막히게 느껴졌다.


드디어 MRI판독 결과가 나왔다. 남편과 함께 신경외과 교수님의 소견을 들으러 갔다.


뇌하수체 선종은 크기도 크지 않고 위치상 시야손상의 원인이 아니라고 했다. 호르몬 검사 결과도 문제가 없는 걸로 보아 그리 심각하게 여길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추가로,

우측 후두엽의 한 부분이 손상된 흔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건 보통 어떤 쇼크나 외부 충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건데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내 나이나 증상상 안타깝게도 다발성 경화증이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다발성 경화증이 뭔진 잘 모르지만 대학교 때 선배 언니 중 하나가 그걸로 시력을 잃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그럼... 눈이 멀 수도 있는 건가요?"


뇌 척수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다발성 경화증일 경우 모든 케이스가 그런 건 아니어도 가끔 시야제한이 진행되며 시력을 읽는 케이스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이젠 남편이 아니라 내가 어마어마한 검사결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마치 이미 나를 잃은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삶이 우리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았다.

아이도 못 낳는데 눈까지 멀다니...


뇌 척수 검사를 받는 것도 우리나라처럼 빨리 예약이 잡히는 게 아니어서 여기저기 알아보느라 오래 걸렸고, 결과도 빨리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의 쇼크를 감당해 내고 검사를 받으러 다니느라 또 한 달여의 병가를 받았다.


뇌척수액 검사는 허리 아래쪽에 바늘을 찔러 뇌척수액을 채취하는 검사였는데, 그 검사 자체도 무서웠지만 검사 후가 더 고역이었다. 검사 뒤에는 뇌척수액 압력이 떨어지면서, 앉아 있으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누워 있으면 좀 나아지고, 조금만 앉아도 통증이 심해져서 일주일 가까이 거의 누워서 지내야 했다.


다발성 경화증 의심진단을 받고 나서 검사를 받고 그 결과가 나와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 병이 무엇인지 검색을 해보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병이라고 했다. 환자의 고통이 심하다고 했다.


확정진단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훈련을 했다.


시야손상이 더 진행되는 최악의 경우, 나는 점점 눈이 멀어 언젠가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다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얼마 안 남은 것처럼 천천히 더 깊게 눈에 담아두었다. 그저 지금을 감사하자고 생각했다.


너무나 커다란 시련이 닥치자 오히려 마음은 놀랄 만큼 차분하고 평온했다.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약간 진공의 상태에 들어간 것 같기도 했고,

은총의 힘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태까지 남들을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다 내어주고 살다가

이제는 나 혼자만 바라보면 되니 고요하고 평안한 쉼의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큰 병명 앞에서

나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요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만 챙기면 되고,

누구도 나를 힘들게 하지 않고,

내게 좋은 말만 해주고,

나를 위해주는 그 시간이

고통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참 따뜻했다.


부모님도 더 이상 내 앞에서 신세한탄과 상대방 욕을 하지 않으셨다.

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 앞에서 두 분은 굉장히 조용해지고 하나가 되었다.


내 맘이 어떤지 물어보시기 시작하셨고,

예쁜 말, 좋은 말만 하셨다.


참 살 것 같았다.




병명은 뇌졸중이라고 나왔다.


뇌척수 검사와 뇌파검사, 경동맥 초음파 검사, 혈액검사 결과들이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선생님들께서 "그럼 대체 왜 우측 후두엽에 상처가 생긴 건지 모르겠다."라고 의아해하실 때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공황장애라고 생각했던 그 날밤의 일이.


내가 여태까지 공황장애라고만 생각했던 것들의 일부는 일과성 허혈증이었다.


내 나이가 젊고, 내가 겉으로는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는 스타일이라 아프다 해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주었고,

일과성 허혈증이라는 것 자체가 잠시 지나가는 것이다 보니 나 역시 계속 공황장애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신경외과 선생님께서는 혈액 순환 장애로 약한 뇌졸중이 왔던 것 같다고 결론 내리셨다.


운동신경이나 언어신경의 손상은 재활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시신경의 손상은 한번 일어나면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라 지금 상태로 머물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그게 쇼크로 인한 일회적 손상이지 점차 진행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시력을 전부 잃을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시야의 윗부분 손상이 아랫부분보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훨씬 적다는 점이었다.

아랫부분이 손상되면 걷다가 걸려 넘어지기 쉽고, 책을 읽을 때도 많이 불편하다고 했다.


윗부분 손상은 책을 보거나 일을 할 때는 거의 불편함을 못 느끼지만

낯선 곳에 가면 위에 있는 선반등 시야에 안 들어올 수 있는 물체를 잘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도로에서 왼쪽 앞부분을 특히 신경 써서 봐줘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을 못 보고 부딪힐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길을 가다가 시야에 없던 사람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나 놀라거나 부딪힐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결혼하고 면허를 따서 몇 년 운전을 해봤지만 그때부터 운전은 못하게 되었다.


걸어갈 땐 시야에 없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도 부딪히면 그만이지만,

운전할 땐 속도가 빠르니까 위험해진다.


사람 많지 않은데선 살살 봐가며 운전해도 된다고는 하지만, 나는 원래도 운동신경이 둔한 편이라,

나도 상대방도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운전을 접었다.


병명은 충격적이었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나는 시야 손상을 담담하게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열등감이 많아서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착하게 애쓰며 사는 거고,

내가 독하게 살아서 아이가 안 생기는 거라는 선배들의 판단.

나보다, 나를 키워준 엄마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확신.

영적 치유를 받으면 그 모든 생물학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길 거라는 이야기는

나를 솔깃하게 만들었고, 나를 찾는 사춘기여행을 하게 했다.


그 여정 속에서 나는 나를 미워하게 되었고,

모든 잘못을 나에게서 찾다가

난임의 모든 잘못을 부모님께로 돌리는 오류를 범했다.


선배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판단을 계기로 엄마아빠에 대한 나의 상처가 드러나고,

쌓여있던 분노를 표현하게 된 것은 정말로 영적 치유에 필요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불행의 모든 원인을 부모님에게서 찾고, 부모님께 욕을 내뱉으며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폭발하는 건 옳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악을 통해 생긴 상처를 인식하는 것이 치유과정에서 필요한 것일 수는 있으나,

사람 안에 악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권했던 방법은 '악'을 보는 것과 악이 드러나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상처를 보고 나서 그것을 인식하고, 용서하고, 그 관계 안에 있었던 '선'도 보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악'만 보다 보니 나는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터질 때 사람의 몸이 얼마나 망가지는지를 보았다.


물론 화가 분출하는 일이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분출이 더 해가 되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착하게 살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천성이 착하고 공부가 좋은 사람도 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마음이 잘 안 맞아 싸우시긴 했어도 천성이 착한 사람들이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아왔고, 남몰래 남을 도우며 사셨는지 나는 보아왔다.

부모님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천성이 착했고,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질투 한 번 없이 동생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고 하셨다.

아빠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다. 원래 학구열이 넘치는 학자의 피가 내게 흐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읽지 말래도 책을 읽고, 피아노도 영어 학원도 배우고 싶다며 보내달라는 아이였다.

공부가 마냥 재밌기만 한 건 아니지만, 옷을 사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게 좋고, 배우고 싶고 궁금한 게 참 많아서 늘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걸 알아가는 게 참 기쁘다.

나는 지금도 그런 사람이다.


이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건데, 부모의 불화 속에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를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너무 강해 착하게 자랐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그래서 독하게 살았고, 그 때문에 아이가 안 생기는 거라고 단정 하는 건 편견이 아니었을까.


물론 엄마아빠 두 분 다 말로 세밀한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라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나를 많이 사랑하는데도 내게 상처를 주신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도 태어나서부터 부모가 아니다.

엄마 아빠 처음해보는 건데 실수할 수 있지 않은가.


부모도 다 처음 해보는 부족한 인간이고

부족한 부모아래서 자란다고 다 못 되는 것도 아니며

훌륭한 부모아래서 자란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요소는 너무 다양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다른데 누군가를 한 가지 내러티브로 쉽게 설명하고 단정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선배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판단을 계기로 엄마아빠에 대한 나의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가 시작된 것은 맞다. 하지만 무책임한 말도 많았다.

"병원 갈 필요 없다",

"다 영적인 문제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독하게 공부하는 것도 다 상처 때문이다."


나는 내가 잘나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어렸을 때부터 가져졌던 좋은 마음은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통해, 사람이 어떤 말을 듣고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얼마나 쉽게 분노하고 못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보았다.


내가 무언가를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추진력과 성실함도 부모와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감사한 선물이고, 내 곁엔 나를 도와준 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희망도 있었다.


물론 부모의 인정을 받겠다는 마음이 무의식 깊은 곳에 조금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마음 하나로만, 그 모든 어려운 시간을 버텨낸 건 아니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삶을 한 가지 잣대로 쉽게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다 다르게 만드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은총과 도우심을 지워버린 채,

모든 능력과 모든 잘못의 책임을 오직 인간에게만 묻는 것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내가 배운 것 세 가지.


첫째. 믿는 사람들도 인간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만났다고 다 믿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둘째. 내가 건강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미워하고만 살면 안 된다는 것.

용서의 중요성을 배웠다.


셋째. 나의 느낌을 믿어도 된다는 것.

나의 감정, 예민함 등이 항상 틀리는 것은 아니라는 자신을 가져도 된다는 것.



큰 병을 얻고 큰 가르침을 얻었다.

시야의 일부를 잃었지만, 그 대신 나와 세상을 보는 시야는 더 넓어졌다.


나는 이제 나를 함부로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미워질 때에도 용서를 선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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