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는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해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행복이 그들에게 미안했고, 그들도 행복해져서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어서 좋은 짝을 만나 예쁜 아기 낳게 해달라고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나처럼 아이가 쉽게 생기지 않는 친구들을 위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남들을 위한 기도엔 응답이 빨랐다. 이제 그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니 나에게도 아기가 생겨도 될 텐데...
'우리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완전히 불가능은 아니니까 언젠가 생길 수도 있어. 괜찮아.' 생각하면서도 친구들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쁘면서도 살짝 불안하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했다. 모두가 나를 앞질러 가고 나만 홀로 남는 것 같았다.
난임연차가 쌓여가면서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나보다 난임 연차가 낮은데 오래 기다리다 아기가 생긴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 생기더라..."라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선배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더 오래됐거든? 나도 다 해봤거든? 아직 때가 아니라 그런 거지 나도 생길거라구!' 하고 속으로 잘난 척을 하며 우쭐거렸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보니 이렇더라... 저렇더라... 애 낳아봐라, 여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펼쳐진다, 어쩌구 저쭈구..." 하며 인생 선배 노릇을 하는 것도 억울했다. '나도 인생 쓴맛 많이 경험해 봤거든? 잠도 많이 못자보고 애 없이도 이 고생 저 고생 다 해봤거든?...' 하고 내가 챔피언이라고 자꾸 안 지려고 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원래 승부욕이 없어서 게임이 그닥 재미없고, 져도 선비처럼 허허 웃으며, 진다고 펄쩍 뛰며 흥미진진하게 승부욕에 불타는 사람들을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심장으로 관조하던 내가 엄마 되기 싸움에선 승부욕에 불탔다.
남들이 나를 다 앞서가고 있는 게 불안해지며 조바심이 나서, 나도 얼른 앞장서고 싶었다. 나도 얼른 기적적으로 여러 명을 다 나아서 잘 키우면서 대가족을 거느리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주변에서 많이 지켜봐서 이제라면 그런 생각을 못할 것 같은데, 그땐 내가 어렸던 건지 철이 없던 건지, 우릴 닮아 나처럼 말 잘 듣고 남편같이 착한 애가 태어나면 애 키우는 게 쉬울 줄 알았다. 지금은 해마다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다 보니 아무리 착하고 공부를 잘해도, 항상 건강하란 법이 없는 거라, 아이의 몸이 많이 아파버리면, 그리고 마음에 큰 상처가 나 버리면 얼마나 마음이 쓰이고 몸과 정신을 다 쓰게 되는지... 퇴근하면 그만인 나와는 달리 평생 함께해야 하는 부모의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울지 짐작으로나마 알지만, 그때는 그랬다.
뭐가 그렇게 쉬운 줄 알고 축구팀을 만들 정도로 많이 낳고 싶고, 다 잘 키울 자신이 있었는지...
아무튼 키프로스섬에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나에게 리타성녀라는 든든한 빽이 생겨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반장도 고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해보고, 대학도 재수하고 결혼도 친구들보다 늦었던 나는 뭐든 한 발짝씩 늦었다. 그래도 다 잘 해냈다. 엄마 되기 승부에서도 늦더라도 대기만성형으로 큰 승리를 거두면 되는 것이다.
'당장 안 생겨도 언젠간 생길 거고, 그것도 넷이나 낳아 보란 듯이 잘 키울테다! 흥 칫 뿡! 아멘!'
마음은 그렇게 씩씩하게 먹었어도, 문득문득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이나 만삭이 된 임산부를 보면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핑 돌았다. 드디어 임신에 성공한 난임동기인 친구가 보낸 초음파사진을 보면, 아무리 내가 난임동기로서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해준다지만, 자기도 오래 겪어봐서 내 맘 알면서 초음파사진까지 보낼 건 또 뭔가 참 섭섭했다. 너무 오래 실망만 겪은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임신을 축하하는 것만도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인데 초음파사진에까지 반응해야 하나... 난임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보낸 것보다 더 많이 마음이 힘들었다.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우면 또 성당에 가서 가만히 앉아있다가... 맘껏 울다가 왔다.
그리고 미사에 갔다가 애들을 두세 명 데리고 가족단위로 온 부모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 보기 좋다'는 생각에 미소가 가득 번지는데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가득 고여버렸다.
'질투하는 거 아닌데?... 서러운 거 아닌데 왜 이래?...' 내 감정의 정체가 뭔지 고민하는 1초 사이에 눈물은 이미 주루룩 흐르고 만다.
'에이 쪽팔리게... 나 힘든 티 내기 싫은데... 괜찮은 척하고 싶은데...'
내 복잡한 맘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재주도 없고, 그런다고 내 맘 알아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럴 바엔 그냥 감춰버리자는 심산이었나?...
자꾸 방어본능만 커져갔다.
믿음을 가지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생각했지만,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은 젊은 가족들과 많이 부딪히게 되고,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있는 봉사들을 다 내려놓는 건 쉽지 않았다. '아니요'를 할 줄 모르는 나,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뭐든지 다 되어주고 싶었던 나는 온갖 감투를 다 쓰고 온갖 봉사를 다 하고 있었다. 성가대, 레지오, 사목회, 청년 기도 모임 봉사, 어르신들 노래교실, 어르신들 통기타교실, 독일성당과의 연락책, 교구회의 참석, 미사강론 독일어 통역등...
독일에 오면 사랑하는 큰딸과 오붓한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부모님은 내가 하고 있는 많아도 너무 많은 활동과 봉사에 기겁을 하셨다. 그 와중에 부모님 일들 다 도와드리고, 합창단도 다니고, 공부도 해야 된다는데 얘가 이러고 뭔 정신에 사는 건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하셨다. 어떤 사생결단이 아니고는 내 힘으론 이 모든 일들을 놓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던 엄마는 신부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애가 이렇게 힘든데 아무것도 모르시고 모든 일을 다 시키시냐고 따지셔서 내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내가 애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간섭하시는 엄마가 원망스러웠지만, 엄마는 아셨던 것 같다. 본인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음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큰 칼을 뽑은 내가 무는커녕 두부도 못 자를 것이라는 것을... 그것보다 엄마는 큰 사랑으로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얼마나 내가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고 힘들게 살고 있는지를...
모든 일을 다 해내는 것보다 엄마와의 갈등이 더 힘들었던 나는 드디어 몸담고 있던 단체에서 하나 둘 작별을 고했다. 심신 쇠퇴와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문제, 난임, 학업의 무게등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커다란 산들이었고 다들 내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몰랐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내가 떠나 생길 빈자리에 대한 허전함과 먹먹함, 그동안의 감사를 담아 사랑으로 내 앞길을 축복해 주었다.
그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내 시간이 많이 생기자 나는 오랜만의 고요함과 평화를 경험했다... 마음이 가볍고 산책도 가고 싶고... 가쁘던 숨이 깊이 쉬어졌다. 그때서야 갑자기 엄마에게 고마워졌다. 외국에 와서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나를 엄마가 지켜주었네...
한때 수도자가 되길 꿈꿨을 때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싶던 그 마음을 한인성당에서 봉사로 불태우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출현으로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거기에 또 섭리가 있겠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실 이 시점에서 제일 원하는 건 엄마가 되는 것이지만, 당장은 안 생기니 어쩔 수가 없고... 리타성녀와의 만남과 여러 가지 마음의 울림을 통해 나에게도 아이가 생길 거란 희망과 믿음이 생겼으니 이젠 다른 생각 말고 내가 지금 처한 임무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하기로 했다.
정단원 자리가 1년 후면 날 거라는 소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초대가 오는 대로 응하던 방송 합창단에도 마음을 서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합창이라도 노래는 체력과 정신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연습과 연주를 마치고 나서 책상에 앉으면 진이 빠져 공부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걸음을 돌리고 성당활동도 모두 그만두었는데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거 한곳에 제대로 집중해서 얼른 끝마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시기가 또 다른 봉사와 소명을 위한... 더 큰 도약을 위한 충전의.. 발돋움의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본격적으로 대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대학교 교정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대학생활의 리듬이 익숙해졌다. 나보다 열 살쯤 어리지만 마음이 착하고 배울 점이 많은 좋은 동기들도 생겼다. 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 고요가 참 좋았다.
시끄러운 세계에서 조용한 세계로의 전환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분 좋고 평안했다.
2015년 가을, 그렇게 나는 음악세계에서 공부세계로 넘어왔다.
아이만 생겼다 하면 육아를 도와주실 작정이 되어있으셨던 부모님은 공부 뒷바라지로 역할을 체인지하셨다. 엄마는 마치 내가 고등학생으로 다시 돌아간 듯 나를 학교 앞에서 픽업하셔서 차 안에서 갓 만들어오신 삼각김밥을 먹이고, 집으로 데려가 진수성찬을 차려주시고, 아빠는 엄마가 보내신 반찬, 김치를 우리 집에 나르는 딜리버리 서비스 등으로 서포트를 해주시며 행복해하셨다. 독일에 오면 맨날 딸을 만나 즐거우실 줄 아셨다가 내가 성당일로 너무 바빠 시간을 못 내드리자 많이 서운해하셨었는데 이제 내가 맘 잡고 공부만 하고, 본인들도 독일에서 나에게 도움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 나를 돌보아주시던 추억의 시간을 다시 돌려받으신 것이 참 좋으셨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언제 손주 보시냐고 많이들 물어보셨을 텐데 내가 신경 쓸까 봐 내색도 안 하시고 우리 딸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다 쉴드를 쳐주시면서...
공부는 내게 있어서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는 종목이었다. 노래는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중요한 날 모든 걸 망칠 수 있지만, 공부는 노래처럼 한 순간이 중요한 종목이 아니고 꾸준함이 중요한데, 난 조용한 곳에 혼자 오래 앉아있는 걸 참 잘했다.
처음 본 단어도 잘도 외워졌다.
하느님께서는 내게 놀라운 능력을 두 개 주셨는데, 언어는 한번 들으면 스펀지같이 흡수하는 뛰어난 능력이고, 숫자는 몇 번을 봐도 계속 잊어버리는 대단히 놀라운 능력이다.
신학공부를 하는 데는 숫자가 필요 없으니 참 다행이었다... 간혹 성경 구절을 민법 형법 몇 조 몇 항 외우듯 내용에 따라 술술 외우시는 교수님들이 계셨지만 나야 뭐 교수님 될 거 아니니까... 숫자는 흘려듣고 내용만 잘 집중해서 들었다.
그때까지의 나의 독일어는 음악 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선 따봉이었지만 신학 전문서적을 읽고 토론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음악세계와 일상에선 필요 없었던 학문적이고 고급진 언어에 충격을 받았다. 세미나에서 토론용 읽기 과제를 받으면, 독일인 친구들은 학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한번 훑고 마는 텍스트를 나는 며칠 전부터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 똥글뱅이를 치고 메모하고 사전 찾고 그래야 겨우 이해가 될까 말까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있은 덕분에 많은 새로운 단어와 고급진 표현들을 배웠다. 힘들긴 하지만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아무리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외국어를 좋아하는 나라지만 그건 독일어로 신학 전공서적 공부를 해야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과목을 가르치려면 성경언어인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까지 공부해야 하는데 동시에 네 개의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 건 좀 '투 머치'였다. 정말 어려웠다. 그리스어랑 히브리어는 한 학기 짜리 초급시험이라 그나마 괜찮았는데 라틴어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내내 한문 배우듯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했어야 딸 수 있는 중급시험을 봐야 했는데, 외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려니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하다 하다 안 되겠어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한국에 있는 비블리카 아카데미아에 온라인 수강등록을 하고 선생님이 내주시는 숙제를 다 하고 한국어로 시험을 치기로 했다.
공부세계에 집중하기로 하긴 했지만 수입이 너무 없으니 방학에는 합창단 객원을 병행했는데 가끔 다른 도시로 연주여행을 가게 되면 거기서도 호텔방에 틀어박혀 라틴어 공부만 했다. 아무리 잘 외우는 편이라 해도 외워야 할 양이 너무 많으니 머리에 쥐가 날 듯했다. 웬 자식복은 없고 언어복, 공부복만 터지는지 너무 힘들다고 불평도 터져 나왔다. 진짜 토하지는 않았지만 '공부하다 토 나올 것 같다.'는 얘기를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건, 눈앞에 닥친 그 힘듦이 다른 힘듦을 잊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얼른 이 힘든 공부를 끝내야겠다는 생각, 그러면 스트레스 덜 받으니 아이가 생길 거라는 생각.
남편의 생물학적 문제는 리타 성녀가 도와줄 거고, 나만 스트레스 안 받으면 다 잘 될 거라는 뇌피셜.
이걸 빨리 끝내고 나면 교사시보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어서 난임의 힘듦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한 결과, 나는 그 어렵던 신학 부전공 교직이수와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시험을 1년 반 만에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 드디어 끝났다... 이제 공부 다 끝났으니까 교사시보만 하면 돼...'
허허허... 그땐 몰랐다.
교사시보가 내 인생에서 겪게 될 난이도 최정상급의 큰 산이라는 것을...
앞으로 산 넘어 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