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근교로 주말여행을 갔었는데 4주년 기념여행은 무정자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다음 날이었다. 이미 예약해 놓은 상태라 여행 갈 기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서긴 했는데 보통 여행을 가는 사람의 설레는 마음은 당연히 아니었다.
평소 작은 것에도 감탄하며 조잘조잘 대화가 많던 우리는 아직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소화하느라 둘 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그러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이나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하는 가족들의 풍경을 마주하면 '나에겐 오지 않을 미래구나...'라는 생각에 가만히 눈물이 흘렀다.
그저께만 해도 우린 곧 저 대열에 들어설 거라 생각하며 아이가 생기면 어디로 이사 갈까 고민했었고, 아이를 벌써 둘이나 낳은 동생과 주변사람들이 아기옷이니 유모차니 장난감이니 다 준다고 했으니 살 게 별로 많지 않을 거라고 안도하며 김칫국을 마셨었고... 사랑하는 남편을 닮은 아이가 그와 비슷한 재미난 말투와 표정으로 우리 앞에서 조잘거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늘 눈에 그리며 꿈꾸어왔다.
다 부질없었다...
이젠 꿈꾸어선 안 될 일들이었다.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들어하면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는 남편이 더 죄책감을 가질까 봐 힘든 티를 잘 내지 못했다.
남편은 자기가 남자로서 쓸모가 없는 것 같다고 고개를 숙이며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촌스런 옷차림에 모태솔로로 오랫동안 혼자 버텨왔어도 구김살 하나 없이 당당하고 남자다웠던 그가 무정자증 선고 한 번에 완전히 쭈그러들었다. 무너진 나의 마음도 봐주고 마찬가지로 충격받은 나도 좀 위로해 줬으면 좋겠는데 자기 연민과 두려움과 불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편을 일단은 구해야 했다.
"괜찮아... 나 수도원 갈 생각이었을 때 어차피 결혼이랑 아이생각 다 내려놨었는데 뭐... 당신 사랑해서 결혼한 거지 아이 낳으려고 결혼한 거 아니잖아. 난 괜찮아. 그러니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우리 난임센터에 가서 다시 검사해 보자. 일반 병원은 기계가 첨단이 아니라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을 수도 있어... 컨디션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암튼 우리 아직 너무 절망하지 말자. 힘내 여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
하며 으쌰으쌰 남편의 기를 살려주려고, 그리고 내가 떠나지 않을 거라 안심을 시켜주려고 괜찮은 척을 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시리고 시렸다.
그때의 여행사진은 온통 풍경 사진뿐이다. 우리 둘의 얼굴이 나온 유일한 사진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나가서 유명하다는 베트남쌀국숫집에서 서로를 찍어준 사진인데 둘 다 미소는 짓고 있는데 눈빛이 울고 있다.
얼마 후 우린 난임센터에서 다시 여러 검사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일반 병원에서는 정자수 검사에 다소 정확도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며, 난임센터에서만 보유하고 있는 최첨단 기기로는 정자의 운동량, 퀄리티, 숫자등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절망 중이던 우리를 위로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있긴 있어요. 아주 없는 건 아니고, 활동이 아주 느리고, 숫자가 일반인의 10분의 1 정도이긴 한데 있기는 있어요. 원인 검사를 더 자세히 해봐야겠지만 다른 여러 방법들도 있으니 아직 절망하긴 이릅니다."였다.
'0'이라는 숫자에 충격을 받았던 우리는 정말로 '0'은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를 했다.
숨통이 좀 트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숫자가 상징적인 숫자라는 것, 아주 가느다란 한줄기 빛처럼 약간의 희망을 줄 뿐, 사실상은 별 의미가 없는 숫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시험관 시술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아이를 정말 갖고 싶기는 하지만, 생명의 시작과 끝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배아도 생명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 배아를 냉동시키고 폐기하는 과정을 거칠 수도 있는 시험관 시술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인공수정은 그래도 수정이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거부감이 덜했는데, 정자수가 너무 적은 우리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정자수가 0은 아니라니까 아직은 그런 의학적 도움보다는 기적이나 행운, 기도의 응답... 뭐 그런 것들을 더 믿어보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도 우리 못지않게 우리의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왜 결혼 4년째 아이가 없는지 많이들 궁금해했다.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괜히 돌려서 물으며 마음을 후벼 파기도 했다. "아이고 요즘 얼굴이 화색이네?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요즘 살이 좀 쪘네, 임신했나?", "혼혈이면 엄청 이쁠 텐데 빨리 보고 싶다!"
결혼하고 살이 많이 쪄서 가뜩이나 내 자신이 보기 싫은데 그런 호기심들이 슬프고 부담스러웠다. 난임센터에서 어마어마한 검사결과까지 알게 된 이후에는 사람들이 왜 아이가 빨리 안 생기냐 물어보면 지레 남편에 대한 보호본능이 발동해서,
"그러게요, 한참 여행 다니려고 안 가지려다 이제 가지려고 생각해요~~" 혹은 "그러게요, 이제 생길 때가 된 거 같다, 그죠~~, 기도 좀 해주세용~ 그래도 아직은 신혼이에요^^" 하고 오버해서 밝은 척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넘겼다. 그게 당시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의례 '어떻게 어떻게 해라.' , '나이가 있는데 너무 미루면 안 좋다', '누구누구도 7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뭘 했더니 생겼다더라.',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다 포기하고 내려놓으니 생겼다더라.', '아이가 없는 걸 즐겨라, 육아가 만만치 않다.' 등등의 코멘트들이 뒤따랐는데, 위안해 주려는 좋은 마음에서 나온 말들인걸 알았음에도 마음엔 스크래치가 쓱쓱 생기고 말았다.
특히 아주 가깝고 믿을만한 사람이다 싶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이러이러하다더라...' 그냥 그렇게 솔직히 터놓을 때면, 요즘 기술이 좋아졌으니 얼른 시험관 시술을 해보라는 이야기... 입양생각은 없냐는 이야기가 툭툭 터져 나왔다. 입양도 나중에는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열어놓았지만, 내가 갖고 싶은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반반씩 닮은 우리 사랑의 열매, 결실, 생명의 오묘한 신비체험, 그런 것이지 그냥 무조건 '아기'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내가 갖고 싶은 건 '우리' 아기였다. 발뒤꿈치만 봐도 사랑스러운 저 남자를 닮은... 그리고 나를 닮은... 그래서 우리 사랑의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될 가장 큰 열매... 그 열매의 새싹을 잉태하여 출산하기까지 일어나는 생명의 신비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 여자만이 해낼 수 있는 그 큰 일을 해내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어줄 '우리 아기'를 갖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램이었다.
"어머... 힘들겠다... 네 마음은 어때?" 하고 물어봐준 사람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랬으면 당장 눈물을 쏟으며 내 마음이 어떤 지경인지 알았을 텐데... 하긴 내가 자존심 때문인지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너무 괜찮은 척을 하며 지내긴 했다. 그러니 누가 내 맘을 다 들여다보고 알아줄 수 있었을까...
그렇게 괜찮은 척을 하며 내 마음을 돌봐주지 못하고 임테기가 한 줄 뿐인 여러 달을 보내면서 나는 서서히 우울의 늪에 빠져들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너무 무겁고 심한 두통, 심한 변비, 속 쓰림이 반복되었다. 한겨울이 아닌데도 몸이 늘 으슬으슬 추웠다.
괜찮다 괜찮다 했는데 안 괜찮았나 보다. 몸이 너 힘들다고, 너 좀 돌보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고 평생 엄마를 꿈꾸던 내가 아이를 낳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받았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었겠는가...!
몸과 마음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신혼 때 점점 건강해지고 밝게 피어오르던 내가 다시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때의 내 삶은 온통 공사 중이었다.
오페라 가수로서의 꿈을 접고 방송 합창단에서 예전처럼 가끔 객원으로 일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던 기술들이 몸에서 점점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어떤 상실감이 자꾸 찾아왔다... 그러나 트레이닝할 시간, 공간, 여유는 없었고 명분도 없었다. 나는 이제 그렇게 하드트레이닝으로 연습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대신 독일학교에서 선생님이 되는 것에 대해 알아보고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하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교사가 부족하다고 음악선생님이 되어보라는 권유를 여기저기서 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감히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독일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진 않았지만, 이젠 내 책과 옷가지 하나 느긋하게 다 풀어놓을 수 없는 코딱지 같은 신혼집이 지긋지긋했다. 남편 월급하나로는 집을 사기 위한 대출을 받기가 어려웠고, 조금 더 큰 월세집을 보러 다니면 맞벌이 부부들에게 밀려 번번이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 조그만 울타리에서 그만 탈출하고 싶었다. 그리고 합창단 객원으로 내 삶을 마칠 수는 없었다. 고학력자인데도 고정수입이 없는 걸 주변사람들이 안타깝게 얘기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오기로 똘똘 뭉쳐 새로운 길을 가겠다 결심했다.
대학교 때 운이 좋아 교직이수로 얻은 중등 교사 2급 자격증을 번역 공증받아 교육부에 가지고 가서 어떻게 하면 독일에서 교사가 될 수 있냐고 문을 두드렸다.
독일에선 두 과목을 가르쳐야 정식 교사가 될 수 있으니 음악 외에 어떤 과목을 가르칠지 생각해 보고 그 과목을 대학에서 다시 부전공으로 교직이수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선 독일의 교육과정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1년 반 동안 교사 시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최소 3년은 걸릴 먼 길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수입이 불안정한 객원교사나 보조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식 교사가 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일엔 '종교'라는 과목이 있으니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신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입학에 필요한 원서를 준비하고, 최고 연주자 과정의 입시엔 필요 없었던 독일어 시험도 다시 준비했다. 해야 할 공부가 많았다.
게다가 두 딸이 다 외국에 살아서 외로우시던 부모님이 독일로 이민을 오신 지 얼마 안 된 때라 관공서며 은행이며 병원이며 쇼핑이며 일일이 따라다니며 도와드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 삶이 너무 버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키프로스 섬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우리를 짓누르는 일상으로부터 떠나 독일보다 훨씬 따뜻한 그 나라에서 좀 쉬고 오자고 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정말 여행이 필요했다. 처음으로 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기꺼이 집을 나섰다.
따뜻한 곳에서 바닷가에서 누워 파도소리, 하늘에만 마음을 집중하니 살 것 같았다.
당시 나는 희망했다가 절망했다가를 반복하는 데에 너무 지쳐, 아이를 희망해야 할지 단념해야 할지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일미사를 드리러 간 그곳 성당의 한 벽면에서 답을 얻었다.
좌절하고 실망한 이들의 수호성인, 불가능함의 성인이라 불리울 정도로 어렵다고 포기할 만한 큰 문제들을 하느님께 전구 해준다는 리타 성녀. 이 성인의 모습과 기도문을 보는 순간 내 마음에는 크고 강한 희망의 빛이 들어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서있다가 사진을 찍었다. 집에 가서 난생처음 본 이 기도를 매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성인의 전구로 아이를 한두 명도 아니고 넷이라도 거뜬히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름도 네 개나 지어보았다. 외국이름이면서도 한국이름처럼 두 음절짜리, 발음하기도 좋은 이름인 '리타, 마리, 테오, 비오'.
나에겐 이미 성인의 전구가 이루어진 것처럼 큰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의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사례라도 리타성녀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전구의 힘으로 우리에게 아기들이 생길 것 같았다. 커다란 희망 속에서 생각으로나마 내 미래의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보는 행복을 누리면서, 그 예쁜 이름들을 가만히 불러보고 일기장에 몰래 적어놓았다.
주먹이 안 쥐어지던 손에 불끈 힘이 솟았다. 다시 다리에 힘이 생겨났다. 미소가 흘러나왔다.
우울의 늪에서 그렇게 나는 하루 아침에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