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첫 번째 난임 판정
남편은 모태솔로였다.
연인이 생기면 함께 해보고 싶었던 것들,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 많다고 했다.
아직 우리가 젊으니 당장 아이를 갖기보다는, 아이가 생기면 가기 어려운 먼 곳으로 여행도 많이 떠나고 우리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오디션을 다니며 터뷸런스가 심한 비행기를 여러 번 타고 트라우마가 생긴 데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알아가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독일에서의 하루하루가 외국인인 나에겐 이미 새로운 것 투성이었고, 이젠 그만 돌아다니고, 안정된 나의 울타리에서 살림을 하며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그래도 너무 오래 혼자였던 남편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니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아이를 갖는다는 게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상대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갖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아직 내 나이가 젊어서 '서른 다섯 전에만 낳으면 되겠지' 싶었다. 남편은 내가 비행트라우마를 극복하도록 특유의 유머와 안정감으로 도와주었고, 이집트, 미국, 인도네시아, 유럽의 여러 도시를 데리고 다니며, 나 혼자라면 가기 어려웠을 곳들을, 그리고 경탄할만한 자연경관과 규모가 큰 도시들의 스펙터클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다지 집을 나서고 싶진 않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가 함께 한 여행길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동을 맛보고 추억을 만들며 유학생활 동안 지치고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다시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노래를 포기하는 게 싫다고 했다. 너 같이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탤런트를 썩히는 것은 너무 아깝다며 아직 젊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 더 시도해 보고 그래도 안되면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운다면 한 명까진 자기 월급으로 어떻게 되겠지만 그 이상은 혼자 벌어선 어렵다고 했다. 내 생각엔 남편 월급만으로도 내가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휴가와 여행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사람에게 여행으로 인한 지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남편이 총각시절부터 혼자 살던 12평 남짓의 작아도 너무 작은 투룸에 살고 있었다. 난 아이를 가능하면 많이 낳고 싶은데, 아이들을 키우려면 방이 몇 개 더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고, 거기다가 여행까지 다니려면 나도 꼭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이 나보고 큰돈을 벌어오라는 건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공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가끔 알바처럼 합창단원으로 일했는데, 거기서 조금 벌어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저 내 탤런트를 썩히지 말고, 자신이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혼자 다 짊어지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냉정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솔직한 게 낫다 싶었다. '내가 너 하나 책임 못 질 것 같아?, 당신은 그냥 집에서 살림만 해도 돼.'라고 말해 놓고 혼자 그 짐이 버거워 술을 퍼 마시고, 다른 이상한 방법으로 은근히 나를 힘들게 하고 원망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뭘 원하고 뭘 힘들어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얘기하는 게 차라리 현명한 거고 겸손한 거다 싶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머리에선 답이 나왔다.
'그래... 아직은 노래를 해야 하는구나... 아이를 많이 낳고 싶으면... 그리고 돈을 벌려면...'
하지만 교회음악가로 돈을 번다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독일 성당은 젊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점점 비어 가고 있는 위기여서 주교좌급의 커다란 성당이 아니면 성가대나 솔리스트 같은 게 아예 없었고, 커다란 성당에선 이미 커리어로 이름난 이들을 솔리스트로 초대해 큰 연주를 하거나, 교회음악학과를 나온 사람이라야 오르가니스트 겸 선창자로 채용하는 그런 구조였다. 인맥도 없고 커리어도 없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한인성당에서, 그리고 작은 독일성당에서 노래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순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봉사였고 생계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송국 합창단에 다니는 게 당시로선 노래로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절대 음감에 초견이 좋은 나는 단원들의 인정을 받아 여러 프로젝트에 초대를 받았다. 초대를 받았다는 뜻은 내가 객원이었다는 뜻이다. 정단원이 아프거나 목감기에 걸려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소위 '땜빵'을 하러 가는 것이다. 오페라가수처럼 사자머리와 진한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오라토리오 곡들을 외우지 않고 악보를 보고 노래해도 되는 이 직업이 편안하고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내겐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어떤 현대곡들을 소화해야 할 때에는 내적으로 괴로웠고, 대학교 때부터 연습해 왔던 잘 아는 곡들의 솔로 부분이 아닌 합창을 부를 때는 이렇게 뒤에만 서 있으려고 10년 동안 공부하고 외국에서 최고연주자과정까지 마쳤나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결정적으론 내가 아플 때 나를 땜빵해 줄 사람은 없다는 사실, 그래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땜빵을 해주고도 내가 아파서 빠질 땐 한 푼도 못 받는 그런 객원으로서의 현실이 나의 자존감을 가장 많이 갉아먹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정단원이 정년퇴직을 하려면 5년이 남아서 큰 변수가 없는 한 5년 동안은 정단원 모집이 없을 거라고 했다.
어차피 돈 벌어야 하고 노래는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늦기 전에 다시 솔리스트로 오디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쳐다도 안 보던 오페라 아리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소리만 냈다 하면 방음이 안되어 시끄럽다며 이웃들이 항의를 했다. 음대는 졸업해서 연습할 곳도 마땅치 않고, 1년가량 독창 연습을 따로 안 하고 합창만 해서 프리마돈나로서 필요로 하는 노래 근육과 감각이 다 무디어져서 괴로워 죽겠는데, 남편은 내가 다시 노래를 한다니 너무 좋아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좋다는 남편이 얄미웠다. 이제 그만하고 집에서 살림을 하고 싶은데, 여기저기서 실패를 맛보고 나 자신도 믿지 못하겠는 나를 아직도 열렬하게 응원해 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좋았다. 음악애호가로서 내 노래를 아껴주시는 아버님께서는 맘껏 큰소리로 연습하지 못하는 며느리의 사정을 들으시고 지인에게 부탁해 연습실을 구해주셨다.
'아직은 노래할 때인가?'
노래를 하라고 하늘이 돕는 것 같았다. 가장인 남편의 의견에 순종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아님 내게도 아직 이루지 못한 세계적 커리어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연습을 했다. 유명한 성악가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고 이태리에 가서 대가들에게 레슨도 받았다. 남편이 잘 될 거라며 비행기표고 숙박비고 레슨비고 다 대주었다. 노래가 늘면서 나도 신이 나서 여기저기 배우러 다녔다.
아이를 낳는 계획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여행을 함께 다니면서... 합창단을 다니면서, 다시 성악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대가들에게 레슨을 다니면서 2-3년이 흘렀다. 그러면서 실력이 몰라보게 업그레이드되었다. 나이도 30대 초반이 되니 소리가 무르익고 성숙해져서 예전과는 수준이 다른 새로운 차원의 기회가 눈앞에 왔다 갔다 했다.
당시 레슨 받던 선생님의 추천으로 테너 쟈코모 아라갈 선생님의 마스터 클래스에 갔다가 발탁이 되어 세계적인 에이전시에 소개를 받았다. 플라시도 도밍고도 소속된 엄청난 에이전시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오디션을 보고 에이전시 사장님의 축하를 받았다. 지긋하고 애정어린 눈으로 말없이 응시하시다가,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났니...'라고 하셨다. 극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게 느껴지고, 성량과 표현과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함께 일하자고, 축하한다고, 곧 연락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오디션이 끝나고 나와 람블라스 거리를 걷는데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분이 다음번 주신 큰 기회 앞에서 컨디션이 무너지면서 난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여러 극장장들이 모인 자리에서의 오디션이었는데 잘하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나를 믿어주신 분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말았다. 좀 더 컨디션 관리를 잘할걸 후회하며 다음에 기회를 다시 주셨으면 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그분은 나를 다시는 불러주시지 않았다.
그 후, 런던의 게오르그 솔티 아카데미, 파리 오페라 아카데미, 발렌시아 오페라 극장 오디션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했다. 최종 파이널 내지는 당선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에서 잠시 산책 갔다가, 혹은 잠시 쉬려고 낮잠을 잤다가 찬 공기에 혹은 건조한 공기에 목이 부어버리는 거다. 아침에 씽씽하게 오디션을 통과해 놓고 저녁에 있는 파이널 오디션에 다른 사람이 되어 노래를 망하는 거다.
독일에서 있었던 오디션들은 좀 다른 상황인데, 일단 줄여서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피드백들을 받았다. "넌 노래는 잘하는데 너무 착해 보여, 이 역할은 좀 더 섹시하게...", "화장을 더 진하게 해야 해... 얼굴이 너무 평평해 보여.", "노래는 참 잘했어, 그런데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이지만 라보엠의 미미는 금발의 백인을 선호하지..." 등등...
뭐... 모두가 한국인인 한국에선 괜찮았지만, 서양인도 있고 동양인도 있는 유럽에서라면 서양인을 선호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이해한다. 파리가 배경인 오페라에 프랑스 외모 여주인공을 원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남원이 배경인 춘향전에 미국사람을 주인공으로 안 세우듯이 말이다. 그 외모의 벽을 뛰어넘으려면 서양오페라에선 서양인보다 2배, 3배는 잘해야 하는 거다. 동양인으로서 서양무대에 선 사람들은 정말 두 배 세배는 뛰어난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처럼 비슷하게 잘하면 안 되는 거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란 속담은 진리다. 인정.
그래, 아무리 잘해도, 운이 안 따라줘서 연주 직전 아파버림 할 수 없는 거고, 내 아우라나 외모가 맘에 안 든다면 그것도 할 수 없는 거다. 난 모든 노력을 다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실력의 최선을 도달했기에, 허무한 포기가 아니라 그 길이 내 길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아프지만 동시에 확신을 가지고 그만두기로 했다.
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했더라면 지금쯤 뭔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나도 포기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고 미래까지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포기를 안 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했을 때의 성공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다. 그렇지만 다 된 밥에 코가 빠트려지는 몇 번의 경험은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하늘의 섭리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충분했다. 내가 애초에 무대에 서고 싶어 죽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음악가로 성공하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2-3년간 가까이서 눈으로 지켜보고, 함께 아파하고, 진심으로 납득한 남편은 그제야 나를 ‘가수가 되어라.'라는 압박 아닌 압박에서 풀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했던 오페라 속 여주인공들과 작별을 고했다.
사실 좀 화도 났다.
'결국 이렇게 될 걸 왜 또 노래하라고 해가지고... 그냥 빨리 아이를 가졌으면 좋았을걸 괜히 나이만 먹었잖아...'
한편, 그렇게 모든 노력을 다 해보지 않았다면 나중에 후회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를 다독였다. 그랬다면 내가 실력으로 어디까지 정점을 찍을 수 있는지도 몰랐을 테고...
암튼 결혼 후 아이를 낳지 않고 노래에 매진한 그 기간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한 곳에서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 준 시간이었다.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내가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해야 할 사람과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음악세계의 일부를 함께 걸으며 서로를 더 잘 알아가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결혼한 지 3년째가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더 미루지 말고 아이를 갖자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여행도 하고 우리 둘만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 내게 고맙다고 했다. 이제 자신도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고 1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기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았다.
남자는 60세, 70세에도 아빠가 될 수 있다지만, 여자의 나이가 결정적이라고 들었는데 노력을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내가 문제일거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며 체력을 키우고, 엽산과 비타민 등 임신준비에 필요하다는 영양소도 챙겨 먹으며 몸을 만들었다. 아이를 갖겠다는 마음을 너무 많이 가져도 오히려 스트레스받아서 안 생기니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생긴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난임센터도 찾지 않았다. 1년 정도는 자연스럽게 시도하며 기다려보고 싶었다.
몸의 준비든 마음의 준비든 하라는 건 다했다. 그런데도 생기지 않자 아직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던 지난 3년의 시간에 대해서까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체온을 재서 기록하며 자연피임을 했는데, 사실 체온이라는 게 그때그때 다를 수도 있는 거고, 남들은 철저히 피임을 해도 사고로 생기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콘돔과 호르몬제 없이 자연피임만을 했는데 3년 동안 한 번도 안 생긴 게 이상하지 않은가?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난임 센터라는 곳을 가봐야 하는 건가?
일단 1차 의료 기관부터 가보자며 우린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산부인과에서 여러 검진을 받았는데 나는 자궁이 깨끗하고 호르몬이나 모든 수치가 다 좋다고 했다.
남편은 자기 혼자 퇴근하는 길에 비뇨기과에 들러 검사를 받고 오겠다고 했다. 휘파람을 불며 출근하러 나갔던 남편이 이상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회사에서 잘렸거나,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셨거나 무슨 심상치 않은 큰일이 일어난 듯 굳어있는 표정이었다. 그 익숙하지 않은 엄숙한 분위기에 나는 무슨 일이냐 물어볼 엄두도 못 내고 뭔가를 말해주길 기다리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마음을 추스른 남편은 말 대신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복잡한 독일어 의학 전문 용어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익숙한 수학 부호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Ø
정자가 없단다. 조금 있는 게 아니고 하나도 없단다...
혼자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그 엄청난 검사결과를 나에게 털어놓고 긴장이 풀린 남편은 그제야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맑게 웃기만 하던 남편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