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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Sep 18. 2019

우리 동네 탐험기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 자유공원

인간은 정체성을 가진 특정 범위의 장소를 인식하여 이름을 붙이고, 장소는 그 이름으로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길을 걸으며, 교통수단을 이용하며 늘 만나는 건물과 장소들. 그들을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왜 이 건물은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 동네는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그래서 우리 동네를 탐험해보기로 했다. 한 곳을 깊이 탐험하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탐험 장소로 결정한 곳은 내 거주지와 멀지 않은 곳이며 상징적이기도 한 곳. 인천에 있는 자유공원이다.


‘지명’은 지표면에 존재하는 지리적 실체의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지명으로 인해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구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장소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하나의 구역을 말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만든 인공물 또한 지명이기에, 종류는 너무 다양하다.

지명의 주된 기능은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의 자연 환경, 생물적 요소로서의 인간주체, 그리고 주체가 대상화하는 타자라는 존재들이 ‘있음’과 ‘거기 있음’을 언어로 지칭하는 것이다.
김순배, 『지명과 권력-한국 지명의 문화정치적 변천』, 경인문화사, 2012, p57

이점을 들어 봤을 때 자유공원의 ‘자유’라는 고유지명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자유’라는 단어가 왜 이 공원에 부여되었는지 궁금했다.


1. 자유공원이란?

출처 : 고지도를 통해 본 경기지명 연구, 2011

우선 자유공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자유공원은 인천 중구에 있으며, 응봉산이라는 산에 있다. 이 산은 높이가 69m로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현재 응봉산 자체를 자유공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자유공원은 인간이 만든 구축물에 이름이 붙은 인공지명이다. 동시에 응봉산의 이름이 자유공원이라 바뀌어 자연지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고지도 중 하나인 여지도에 나오는 그 당시 인천 중구는 다소면(多所面)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2008,

자유공원은 1888년에 응봉산 일대에 우리나라에 서구식 근대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서울의 현재 탑골공원으로 불리는 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다. 자유공원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만국공원’이라 불렸다. 이는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던 만국지계(萬國地界)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계(地界) 또는 조계(租界)는 원래 19세기 후반 중국의 개항 도시에 있었던 외국인의 거주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열강들이 중국에 진출하는데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응봉산 아래 도 외국인들이 살며 자체적인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지계라 부른 것이다.


만국지계는 달리 각국지계(各國地界)라고도 불렸기에 만국공원은 ‘각국공원’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이는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각국 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고 이들이 공동 관리했기 때문이다.


14만 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에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았다. 그 위치는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883년 청국과 일본이 조계를 설정하자 영국과 미국, 독일도 서둘러 조계를 A, B, C, D 등급으로 나누어 설정했는데, D 지구로 분할된 곳이 현재의 자유공원으로 부르는 각국공원이다. 공원은 1888년 11월 9일 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 서리 ‘조병직’과 미국, 러시아, 영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외교관이 공동 서명한 ‘인천항구각국조계장정’ 의해 설립되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leekejh/6464118

각국공원이 공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88년 당시 독일인이 경영하던 세창양행이 이곳의 땅을 사서 서양식 직원 사택을 짓고 사교클럽인 ‘제물포 구락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공원을 설계한 사람은 러시아의 측량기사 ‘사바친’인데 공원 조성을 일본식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항구가 보이는 언덕공원'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1910년 국권침탈 후 일본의 강압으로 조계가 없어진다. 1914년 각국 거류지 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관리권이 인천부로 넘어가고 각국공원의 이름은 ‘서공원’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에 신사를 세우고 조성한 공원을 ‘일본공원’으로 부르다 ‘동공원’으로 고쳐 불렀다. 이때 각국공원이 동공원의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에 서공원으로 불린 것이다. 서공원으로 개칭되며 공원의 주요 건축물도 대부분 일본인의 소유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후 서공원은 한동안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공원 일대 건축물의 소유와 용도도 다시 바뀌었다. 인천각(존스턴별장)은 미군정청에서 독신자 고급장교 숙소로 사용하고, 인천향토관으로 사용되던 세창양행 사택은 1946년에 인천시립박물관이 되며 공원 일대는 새로운 인천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이 일대는 큰 수난을 겪는다. 수세에 몰려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이때의 함포사격으로 서양 건축물이 대부분 파괴되어 공원의 경관은 크게 변화됐다.


휴전 이후 1957년 개천절에 인천시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과 각종 기념조형물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꾸어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자유공원 지명 형성의 유래와 과정

지명의 변화 가능성은 새로운 인식(이념, 권력, 정치)의 출현, 식민주의·탈식민주의, 지명 대상의 변화(통합, 분할), 전쟁과 정복, 원주민 지명의 회복, 언어적 요구 등 여러 가능성에 의해 발생한다. 자유공원은 인간이 만든 구축물에 이름이 붙은 인공지명임과 동시에, 응봉산이라는 산 이름이 자유공원이라 바뀌어 자연지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인공지명으로서 자유공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3125

각국공원, 만국공원, 서공원, 자유공원 등 자유공원은 개명을 많이 한 공원이다. 자유공원의 장소 인식은 이름의 변화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각국공원과 만국공원, 서공원은 위치의 인식으로 인해 이름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각국공원과 만국공원은 여러 나라의 지계를 중심으로 공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부여되었다.


이후 서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는 공원이 두 개로 나뉘었을 때 일본 신사가 있던 동공원의 반대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공원으로 이름이 바뀔 시점에는 다른 열강세력들은 물러나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했고, 우리에게는 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각국공원과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경우보다 강제적인 힘이 더 적용된 이름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서공원은 광복 이후 다시 만국공원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전의 만국공원은 여러 나라가 모인다는 뜻의 만국공원(萬國公園)이었다면 다시 불리는 만국공원은 만이라는 큰 숫자처럼 크길 바란다는 뜻으로 만국공원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변경돼 지금까지 사용하는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동일시’의 과정을 거쳤을 것 같다. 동일시는 대상과 같음을 추구함을 뜻하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는 뜻으로 공원에 자유라는 고유지명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 자연지명으로서 자유공원

응봉산에서 자유공원으로 이름 변화를 설명하기 전에 응봉산의 지명 유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천광역시 홈페이지에서는 응봉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응봉산이라는 이름은 그 모양이 ‘매(鷹)의 부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는 해석이 있다. 이 산이 우리말로 ‘매부리산’이라고 불려온 만큼,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응봉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산의 모양이 실제로 매의 부리를 닮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응봉’이라는 산 이름은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그 모두가 매의 부리를 닮아서 붙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실제 이들 가운데 매와 관계돼 이름이 생긴 곳은 많지 않은데, 이들은 ‘응봉’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전에 ‘매봉’, ‘매부리’, ‘수리봉’ 등의 순 우리말로 불린 것이 대부분이다. 이때의 ‘매’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산(山)을 뜻하는 순 우리말 ‘뫼’의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또 ‘봉’은 봉우리를 말하고, ‘부리’는 ‘뾰족한 것’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수리’는 지금도 ‘정수리’등에 쓰이는 것처럼 ‘높다’는 뜻의 우리말이며, 동네에 있는 여러 산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를 흔히 ‘수리봉’이라고 불렀다. 결국 ‘매부리산’은 ‘뾰족한(부리) 산(뫼)’에 ‘산’이 덧붙었거나, 그냥 ‘뫼’였던 것이 ‘매’로 발음이 바뀐 뒤 여기에 사람들이 ‘매의 부리처럼 생겼다’는 상상을 덧붙이면서 매부리산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응봉산은 이 매부리산이 한자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산을 뜻하는 우리말 ‘매’를 새 ‘매’로 잘못 알아 ‘응(鷹)’으로 옮기고, 여기에 봉우리의 ‘봉’자가 붙어 이뤄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자 ‘봉(峯)’은 우리말 봉우리의 ‘봉’과 소리가 같아 일찍부터 순 우리말처럼 쓰인 글자다.”


응봉산은 오포산(午砲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이는 인천일본거류민회에서 관측소에 시보를 위촉해 매일 정오에 구식대포를 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포성으로 때를 알리는 것이 경제적이라 여겨 1908년 11월 9일부터 오포를 실시했다.


응봉산, 오포산, 자유공원. 자연지명으로서 지명변화의 과정은 이끌어내기 어렵다. 영역의 변화는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구역 면에서 크기 변화는 없다. 하지만 현재 응봉산 자체가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응봉산이라는 산 자체도 산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높이다. 자연스럽게 자유공원이 되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3. 자유공원의 정체성

장소는 감정 이입의 대상이고, 생활공간이며 사회관계의 장이다. 또한 개인적인 사회생활이 교차하는 지점들의 집합이자 개인들의 동일시 양상이 전개되는 존재론적 장이므로 집단적인 아이덴티티의 형성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보다 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장소는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한 사회적 주체로서 성립하는 기반인 동시에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아이덴티티가 연출되는 무대이다.


사회적 주체의 이름에 공간의 이름인 지명을 덧붙임으로써 자아와 관계 맺고 있는 위치와 영역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자아의 아이덴티티와 이데올로기를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재현한다. 일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지명의 기능은 단순히 대상을 지칭하려는 목적을 넘어 특정한 사회적 주체의 아이덴티티와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지명은 때때로 사회적 주체의 아이덴티티와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주는 의미를 지니는 특정한 문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김순배는 그의 저서에서 아이덴티티를 ‘수적 아이덴티티’와 ‘질적 아이덴티티’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수적 아이덴티티’는 개인의 개별성을 기초로 하여 형성되며, 지시적 요소인 ‘이것’으로 확정되는 단수 주어나 이름 같은 고유명사를 통해 물질적 개별성의 지시를 확정하는 특성을 지닌다. ‘수적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지명 명명은 지명의 기본적인 기능인 특정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구별하고 지시하는 기능에 관련된다. ‘질적 아이덴티티’는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체계와 소속 공동체의 특성을 표현한다.


나는 자유공원이 ‘수적 아이덴티티’와 ‘질적 아이덴티티’ 모든 부문의 특성을 갖고 있으며 자유공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장소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공원의 이전 이름이었던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 많은 외국인 모두 자유롭게 드나드는 쉼터, 산책의 거리라는 점에서 수적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유공원은 자유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우리나라의 공동체적 특성을 잘 표현했다. 그래서 질적 아이덴티티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공원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가들이 회의를 하던 곳이었다.


인천광역시 중구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항 중의 하나가 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회의’라 할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3월 초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현구, 이용규,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면서 그 수립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계의 대표들이 1919년 4월 2일 오후에 비밀리에 각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수립 선포할 것으로 결정했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역할을 한 대단히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각국공원에서 개최된 것은 바로 3.1운동으로 분출된 인천지역 항일민족운동의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 장군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공원의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변경한 것도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 가치관의 유지를 위해 자유공원의 이름은 인천에 사는 사람들 인식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탐험을 마치며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라는 점, 자유가 얼마나 큰 가치인지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처음 준공될 때는 우리나라에 야욕을 품은 나라들에 의해 지어지고 지명 또한 큰 정체성 없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체성을 부여했고 지금도 그 정체성을 유지해 나간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탐험이었지만 깊이 공부할수록 이름을 지을 때도 많은 변수가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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