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적 결정의 어려움
투표의 역설(Voting paradox)은 다수결 방식을 통해 이행성이 있는 사회적 의사결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하며,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s paradox)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마을에 김, 이, 박 씨 세 사람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이 엇갈릴 경우 과반수제에 의한 표결에 의한 표결로 처리한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세 사람이 모여 마을 앞의 다리를 놓기로 했다. 그리고 어떤 규모로 놓을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각자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결국 표결로 결정하게 되었다. A안은 다리를 가장 크게 놓자는 것이었고 B안은 중간 정도의 크기로 놓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C안은 가장 작게 놓자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이 안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 씨는 다리는 클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안을 A, B, C 순서로 정했다. 이 씨는 중간 크기의 다리가 가장 좋고 그다음으로 작은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놓은 순서는 B, C, A였다. 마지막으로 박 씨는 가장 작은 규모가 제일 좋고 그다음은 가장 큰 다리라고 생각해 C, A, B의 순서로 정했다.
이 문제에 대한 표결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에 의해 진행된다. 우선 두 안을 짝지어 표결에 붙여 과반수의 지지를 얻은 것만을 남기고 다른 안은 탈락시킨다. 둘 중 살아남은 안을 제3의 안과 다시 짝지어 표결해 과반수의 지지를 얻은 것이 최종적인 승자로 채택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안 중 우선 A와 B를 짝지어 표결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김 씨와 박 씨는 A에 표를 던질 것이며, 이 씨만 B에 표를 던질 것이다. 따라서 B는 탈락하고 A가 살아남아 C와 겨루게 된다. 그런데 A와 C 사이의 표결에서는 김 씨만이 A를 지지할 뿐 나머지 두 사람 이 씨와 박 씨는 C를 지지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작은 규모로 다리를 만들자는 C가 최종적인 승자가 된다.
이번에는 이 표결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되, 둘씩 짝짓는 순서를 바꾸어 표결을 진행해 보자. 먼저 B와 C를 먼저 짝지어 표결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 표결에서는 김 씨와 이 씨가 지지하는 B가 박 씨만 지지하는 C를 선택한다. 이후 B와 A가 대결하면 김 씨와 박 씨가 지지하는 A가 이긴다. 결국 순서를 바꾸어 진행한 이번 표결에서는 A가 최종승자가 된다. 앞에서는 C가 최종승자였는데, 표결의 순서가 바뀌자 A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단지 비교순서만 바꿔도 채택되는 안이 달라지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투표의 역설 현상이라고 부른다.
과반수 표결방식은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집단의사결정 방식 중의 하나다. 전원합의제, 혹은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요구하는 제도 등 여러 가지 다른 결정 방식이 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과반수제가 사용된다. 그런데 과반수제 하에서는 지금 본 바와 같은 투표의 역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현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의사 진행 과정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비교의 순서에 따라 최종승자가 달라지는 점을 이용해 특정한 안에 유리한 비교 순서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회의에서는 사회자가 발언 순서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사소한 것까지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앞의 예에서 본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두 안을 먼저 비교할 것인지를 선택했을 때 표결의 결과는 이미 판가름이 난다. 만약 그 세 사람 중 하나가 표결 순서를 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 언제나 그가 지지하는 안이 채택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투표의 역설 현상은 여러 사람이 모여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한 좋은 사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