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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Mar 22. 2021

우리말 겨루기에 나가다 1

내 2020년 가장 큰 행사는 무엇보다 KBS <우리말 겨루기> 출연이다. 나는 방송에 나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것은 초등학생 때 OGN(당시 온게임넷)의 <생방송 게임콜>에서 목소리로만 나와 게임을 즐겼던 것, MBC <나는 가수다> 청중평가단으로 나와 노래에 심취한 표정을 지은 것, 멍때리기 대회 때문에 각종 뉴스에 살짝 비춘 것 정도다. 하지만 이번 출연은 달랐다. 한 시간가량 방송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망측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기념할 만할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출연 이야기와 후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단순하다. 심심해서. 지루한 일상 속에서 해마다 뭔가를 해봐야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잠길 때쯤 TV를 보다 예심 광고를 봤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마침 한국어능력시험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공부한 어휘를 한번 점검해보고 싶었다. 때는 추운 2월이었고 여의도에 있는 KBS로 가는 길은 눈이 내렸다. 여정이 힘들 것 같아 관둘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이후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히 걸으며 KBS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니 실제 방송처럼 십자 풀이 화면을 크게 두고 문제를 함께 풀고 우수 득점자를 선별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면접을 본 후 최종 합격자를 뽑는 2차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문제를 풀지 않았다. 문제가 인쇄된 종이와 자기소개서 종이를 받아 거리를 두며 작성했다. 제한 시간 없이 풀 수 있을 때까지 푸는 방식이었다.


문제지를 봤을 때 떠오른 생각은 ‘망했다’였다. 한국어능력시험 문제와는 결이 다른 문제들이었다. 길게 나온 뜻풀이를 보며 이에 해당하는 단어를 적어내야 했는데 해설만 보고서는 무엇이 답일지 전혀 몰랐다. 시간이 많이 주어져도 풀 수 있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풀었던 문제도 답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글자 수는 십자 판만 세어보아도 알 수 있으니 대충 글자 수에 맞춰 답을 적었다. 나는 언어 창조자였다. 내 답지를 보는 사람은 얼마나 웃을까? 자신감이 아닌 자괴감에 흠뻑 취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백지는 내지 않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풀어보려 애썼다.


답지를 내고 내 면접 차례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애청자, 과거 출연자, 너무 출연하고 싶은 사람 등 여러 가지 이유와 특징을 내세우며 다들 출연하고 싶은 마음을 표출했다. 나는 너무 문제를 못 풀어서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으로 면접에 임했다. 내 답지를 본 작가님이 바로 하는 말은 “많이 틀렸는데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였다. 창피함과 안도감이 7:3의 비율로 나를 찾아왔다. 면접은 딱딱한 면접이 아니라 담화에 가까웠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했다. 30분 정도 면접을 마친 후 어쩌면 합격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집에 돌아왔다.



예심 후 <우리말 겨루기>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가 결과를 찾았다. 예심을 봤다고 말한 사람은 가족 밖에 없었지만, 혹시라도 떨어진다면 창피할 것 같았다. 이왕이면 합격을 바랐다. 얼마 후 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이 올라왔고 내 이름도 적혀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환호했지만 환호하자마자 걱정이 몰려왔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언제 나가게 될까, 나가면 나는 한 문제라도 풀 수 있을까. 내 합격 소식을 들은 엄마도 처음에는 반겼지만 얼마 안 가 나가면 개망신이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출연을 반대했다.


순간 면접 당시 작가님의 말이 떠올라 너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방송 출연자 구성은 특정 출연자의 독주를 막기 위해 비슷한 수준끼리 출연자를 모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저득점자일 테니 나와 함께할 출연자들도 저득점자일 거라는 것이다. 조금만 노력한다면 나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겠지만.


그날 이후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 방법은 반복 숙달. 첫 번째는 사전으로 공부하기. 가장 두꺼운 사전을 한 권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다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두 번째는 방송 다시 보기. 문제 유형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말 겨루기를 최근 화부터 2017년 정도 방송분을 봤다. 문제 위주로 보며 방송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였다. 누리집에서 다시 보기를 이용하거나 스마트폰으로 KBS 앱과 웨이브를 활용했다. 마지막으로 진행자인 엄지인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엄지인 아나운서가 출연하는 방송을 다 찾았다. <생로병사의 비밀>(보는 중간 진행자가 김솔희 아나운서로 바뀌어 이후로 보지 않았다.),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 라디오 방송인 <새아침의 클래식> 등 최대한 빼먹지 않고 보고 들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선생님 중 한 분이 듣기 실력을 쌓기 위해 자는 동안에도 테이프를 틀어 듣기 공부를 하라고 했었다. 그게 생각나서 목소리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문제 풀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하고 보니 잘 모르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을 반복하니 어떤 문제가 나올지 예상을 하게 되어 사전을 읽을 때도 이미 출제된 단어나 외래어, 십자 풀이에 적합하지 않은 단어 등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단어는 건너뛰었다. 그러니 읽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방송을 볼 때는 나도 출연자인 것처럼 문제를 들으면 바로 답을 내려고 노력했다. 시간은 부족한데 지난 방송분이 너무 많아 여러 번 돌려보지는 못했다. 


언제 출연 날짜가 정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때로는 공부하는 것이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려고 노력했다. 이 일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자격증 시험공부를 병행해야 했기에 시간을 분배하며 공부해야 했다.


예심 합격 발표 후 녹화하는 날을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공부할 시간이 주어져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계속 이 공부를 붙잡고 있기에는 다른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렇게 여름이 되었다.


연락은 갑작스럽게 왔다. 늘 그렇듯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려 전화를 보니 제작진의 연락 달라는 문자가 와있었다. 전화를 거니 내게 출연할 수 있는지 물었고 가능하다고 하자 지원 당시 메일 주소로 사전 인터뷰 질문지를 보낼 테니 적어 다시 보내 달라고 했다. 드디어 방송에 나가는구나. 기약 없던 출연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질문지에는 다양한 질문이 있었다. 방송에서 문제만 푸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재미난 요소를 뽑아내기 위해 중간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흥미 끌 만한 이야기가 있는지 찾기 위한 것 같았다. 답을 보낸 후 얼마 지나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개인사를 다 말하는 것이 민망하기도 했지만 친한 친구와 통화한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묻는 것에 대답했다. “신나는 노래 가능하신가요?” 질문지에 적을 것이 없어 노래 관련해서 이야기를 적어냈더니 녹화할 때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고 작가님이 물었다. 예전 방송을 봤을 때 가수를 빼고 대부분 한두 소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떠올라 별거 아니란 생각으로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녹화일은 8월 11일이었다. 충분한 시간이니 그동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에 방송 준비를 위해 몇 번 더 연락을 받았는데 노래를 1절을 다 부르라는 말을 들었다. 여유로웠던 마음이 사라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개망신. 이 세 글자가 눈앞에 자꾸 보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꼴등을 하면서 당할 망신, 다른 하나는 노래를 불러 당할 망신. 꼴등을 하더라도 한 문제는 무조건 맞혀야 한다. 다짐한 나는 공부는 안 하고 노래 가사만 외웠다. 꼴등보다 노래를 망쳐 망신당하는 게 더 창피할 것 같았다. 


가족 응원 영상도 달라기에 엄마의 모습을 촬영했다. 10초 정도의 영상을 찍기 위해 엄마는 피나는 연습을 했다. 짧은 문장을 읊는데도 계속 NG가 났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하는 배우들과 제작진이 얼마나 고생할지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녹화한 영상을 보냈더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나보다는 진행자인 엄지인 아나운서를 응원하는 내용으로 다시 찍어달라고 했다. 이게 뭔 소린가 했지만,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아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다시 찍어야 한다는 말에 귀찮아하는 엄마를 설득하느라 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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