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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Apr 06. 2021

우리말 겨루기에 나가다 2

녹화일이 확정되고 나니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갔다. 녹화 날이 되어 연차를 내고 KBS가 있는 여의도로 향했다. 녹화일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전국 곳곳이 수해를 입고 서울도 지하철 역사가 침수되는 등 여러 사고가 있어 제때 갈 수 있을지 걱정하며 갔다. 다행히 내가 갈 때쯤 비가 서서히 그쳤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괜히 우중충했던 내 마음도 개는 것 같았다.


원래 <우리말 겨루기>는 KBS 본관에서 녹화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녹화한 곳은 별관이었다. 본관에 있는 촬영장에서 특별생방송 녹화가 있어 부랴부랴 옮긴 것이었다. 신분증과 출입증을 바꾸고 작가님을 만나 대기실로 갔다.


별관에서 촬영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아쉬웠다. KBS 식당 밥을 못 먹기 때문이다. 한 블로그에서 대기하는 동안 본관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서 KBS 밥은 무슨 맛일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관에는 식당이 없어 도시락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왠지 편의점 도시락이나 한솥도시락을 줄 것 같았다. 


<우리말 겨루기>의 출연자는 진행자를 빼고 총 4팀이다. 대기실에 가니 출연자 두 분이 이미 와 있었다. 아주 유쾌한 아주머니 출연자와 공부에 열중하던 학생이었다. 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셔서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출연자들에게 주고 싶다며 직접 수세미를 짜 오셔서 하나씩 건네주셨다. 나도 집에 나오기 전에 내가 만든 잡지를 한 권씩 줄까 생각했었는데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 돼서 그냥 나왔다. 그냥 가져올 걸 후회했다. 아주머니는 1등보다는 화면에 많이 나오는 것이 목표라고 하셨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 같았다.


학생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중학생 때 예심을 봤는데 이제야 출연이 확정되었다고 말했다. 수능 공부와 이 방송의 문제가 비슷하다고 말하는 걸 보고 주눅이 들었다. 정말 개망신만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잡생각들을 떨치려 대충 공부한 내용을 요약한 공책을 뒤적거렸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출연자가 도착했다. 젊은 여자분이었다. 곱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전공자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 또 한 번 주눅이 들었다. 이번 대결이 왠지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어 혼란에 빠져있을 때 작가님이 오셔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촬영하는 동안 주의할 점, 규칙 같은 것들이었다. 여러 사례를 들며 이야기를 해주는데 세상에는 경쟁심이 투철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에는 다 편집되었을 뿐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질 때 지더라도 구차하지 않고 당당하게 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도시락이 들어왔는데 역시 한솥도시락이었다. 배가 고픈데 괜히 먹었다가 체하는 게 아닐까 걱정돼 깨작거리며 먹었는데 어느새 빈 도시락이 되어버렸다. 사실 배가 고팠다. 다 먹을 거면서 속으로 투정 부린 내가 우스웠다.


출연 동의서에 서명하고 이전에 사전 인터뷰했던 내용을 토대로 예상 질문과 이에 대한 답안 예시를 받았다. 전날 밤까지 이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겠다는 둥 연습을 했는데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돌발 행동이나 말을 똑바로 못할 것을 대비하기 위해 질문과 답도 정해준 것 같았다. 외워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나는 컴퓨터라도 된 것처럼 멀티태스킹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말 공부, 이따 불러야 할 노래 가사 외우기, 인터뷰 답 외우기. 녹화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방송 화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한 명씩 다른 방으로 가서 전문가에게 화장을 받았다. 덕지덕지 얼굴에 분을 바르는데 분명 내 코는 막히지 않았는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모공이 숨을 못 쉬어서 그런 건가. 화장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처음으로 느껴봤다.


녹화 전에 잠깐이라도 엄지인 아나운서를 만나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출연자 모두의 바람이었다. 감사하게도 엄지인 아나운서가 오전 방송을 마치고 잠깐 인사를 하러 와줬다. 아이돌이나 배우를 보면 후광이 비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피부가 새하얗고 고운 사람이 들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엄지인 아나운서였고 정말 빛이 났다. 작은 대기실이 들썩였다. ‘엄지인 아나운서도 빛이 나는데 실제로 연예인을 보면 그 사람들은 얼마나 빛이 날까?’ 궁금증이 생겼다. 다들 엄지인 아나운서와 사진을 같이 찍었다. 나는 미리 엄지인 아나운서의 저서를 두 권 준비해왔는데 맨 앞장에 사인을 받았다. 잠깐의 만남 후 엄지인 아나운서는 방송을 준비하러 본인 대기실로 갔고 나는 녹화 시간이 다가와 비에 젖을 것 같아 입지 않고 챙겨온 옷을 화장실에서 갈아입었다.


시간이 되자 제작진이 우리를 촬영장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녹화하는 곳은 원래 <가요 무대>를 녹화하는 곳이라서 기존 촬영장과는 조명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머리 위로 조명이 잔뜩 있는데 눈이 부셨다. <가요 무대>를 보면 화면에 거대한 무대와 엄청난 수의 방청객으로 가득 찬 관객석이 눈에 띄는데 실제 촬영장은 작았다.


원래대로라면 출연자들의 가족, 친구 등 여러 사람과 섭외된 방청객이 모여 함께 방송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조촐하게 녹화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왔다면 더 긴장돼서 문제를 더 못 풀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이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분위기 속에서 했을 거란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준비된 세트장에 올라가 녹화 전 방송 장비를 점검했다. 정답 호출 단추를 눌러보고, 마이크도 테스트하고, 태블릿에 글씨를 적는 연습도 했다. 흘려 적지 말고 최대한 알아볼 수 있게 적어야 한다고 해서 꾹꾹 눌러 적었다. 악필이라서 못 알아보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내 인생 최고 아름다운 글씨가 여기서 나왔다. 미리 몸풀기로 지난 방송 문제를 풀어보는데 다른 분들이 빠르게 단추를 누르고 문제를 풀었다. 이렇게 기선 제압당했다. 정신 놓고 있다가는 한 문제도 못 맞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온몸을 감싸던 긴장이 다 풀렸다. 제작진이 미리 이것저것 이야기한 것도, 엄지인 아나운서가 찾아준 것도 다 출연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녹화에 임했다.


내 전략은 ‘모르는 것은 풀지 말기’였다. 괜히 알쏭달쏭한 문제에 달려들어 틀리면 감점되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문제는 남들이 맞추더라도 초조해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절대 단추를 누르지 않기로 했다. 계속 아무도 못 맞추면 방송 진행을 위해 거의 답 알려주듯 힌트를 준다. 그때 맞춰도 늦지 않다. 운이 좋았던 걸까? 문제가 술술 풀렸다. 내가 공부한 것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만 내가 말하는 답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맞았다. 문제가 쉬운 편이었다. 출연자와 문제 구성을 수준에 맞게 해준다더니 녹화 시간 내내 ‘우리가 예심을 통과하긴 했지만 정말 저조한 성적으로 통과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로 나온 맷돌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녹화 중간마다 출연자들에게 엄지인 아나운서가 질문을 던졌다. 사전에 알아서 다 편집할 테니까 나중에 집에 가서 이 말 못 했다며 후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제작진들이 말했다. 그래서 정말 아무 말이나 다 했다. 엄마 응원 영상이 나오는데 내가 찍은 영상인데도 여러 사람과 함께 보려니 창피해서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노래도 불렀는데 제작진이 노래 MR까지 준비해준 정성에 보답하려 열심히 노래했다. 우리말 공부보다 가사 외우는 데 노력했는데 빛이 바래지 않길 바라면서. 세트가 무너지니 심하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해서 얌전히 춤도 췄다.


문제를 꽤 많이 푸는 바람에 엄지인 아나운서가 내게 계속 점수가 높다고 말해줬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적당히 맞추라는 말이다.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는 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도 제작진이 사전에 짚어준 것이었다. 그래서 몇 문제는 답을 알겠는데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품권과 한우 선물 세트가 걸린 문제는 못 풀었다. 만일 출연 예정자가 이 글을 본다면 상품이 걸린 문제는 필사적으로 맞추라고 권하고 싶다. 상금을 받는 1등을 제외하면 2등부터 4등까지는 출연료가 같다. 그래서 부가 상품이라도 더 가져가는 것이 좋다.



망신 당할까봐 걱정했지만 4인 도전 문제에서 2인 도전 문제까지 올라 달인 문제를 풀었다. 달인이 될 거라는 기대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2단계 띄어쓰기 문제까지는 갔어야 했는데. 1차에서 떨어져 버렸다. 한국어능력시험을 공부하면서 봤던 단어였는데 그걸 틀리다니. 너무 아쉬웠다. 엄지인 아나운서가 답을 바꾸라고 그렇게 힌트를 주는데 안 바꾼다고 고집 부린다고 보는 사람마다 그 말을 했다.


녹화를 마치니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촬영장은 세트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콘서트가 끝나고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가수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허무함이 점점 커졌다. 마치 군대 전역 날 같았다.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몇몇 제작진이 같이 식사하고 가라고 해서 식당에 갔다. 원래 이렇게 같이 밥 먹을 일이 없는데 우리는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말을 들었다. 놀랍게도 엄지인 아나운서도 함께 밥을 먹었다. 이런 영광이. 함께 먹은 음식은 평양냉면. 생전 처음 겪는 맛이라서 당황스러웠는지, 식사 자리가 부담스러웠는지 제대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우승하고 나니 기쁜 마음보다는 같이 출연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명씩 커피와 케이크 기프티콘을 보냈다. 괜한 허세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각자 최선을 다했기에 그냥 후련하게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게 맞는 것인지, 그들의 노력의 대가가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게 뭔가 전해주는 게 맞는 것인지. 생각이 많으면 골치 아프기 마련이다. 


녹화 후 실제 방송하는 날은 2주 뒤다. 제작진은 방송을 편집하는 동안 필요한 사진 같은 게 있으면 보내 달라고 연락을 했다. 어떻게 방송이 나올지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방송을 보라고 연락했다. 방송일인 8월 24일은 근무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역장님과 함께 역무실에서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봤다. 내가 내 모습을 보려니까 쑥스러워 혼났다. 내심 화면에 많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와 달리 이것저것 한 말들은 다 편집되고 한 거라곤 노래 부른거 밖에 없었다. 방송을 중간에 보는 사람들은 나를 그냥 놀기 좋아하는 백수 아저씨라고 여겨도 될 정도였다. 방송을 많은 사람이 보는지 실시간 검색어에 문제로 나온 단어가 순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신기했다.


방송하는 시간 동안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받아서 신기했다. 엄마는 주변 연락을 받느라 방송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 많은 이모께서 “웬 조가 놈이 하나 나오더니 나중에 너(엄마) 같은 얼굴이 나와서 다른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네가 맞다”라고 했단다. “근데 걔(나)는 왜 그 문제를 틀리느냐”라고 물어보셨다고 하셔서 너무나 창피했다. 이모님. 조카가 이렇게 무식합니다.


이 방송을 찍고 나서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달인 문제를 너무 허무하게 틀려서 창피함이 내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방송이 끝나니 후련해졌는지 신기하게 잠이 잘 왔다. 


방송 출연을 하고 나면 2년 뒤에 다시 예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원래 미련 없이 깔끔하게 더는 나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이모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 체면치레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노래는 그냥 노래일 줄 알았는데 정말 내가 TV에 나왔다는 건 꽤 재미난 경험이었다. 이렇게 뭔가 해내기 위해 열정을 쏟은 과정도 그 순간은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즐거운 일이었다. 어떻게 쓰일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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