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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Apr 19. 2021

슬기로운 인턴생활. 이었을까?

노동요 - 철도 인생

인턴 생활 시작

인턴 합격자 발표와 본사 OT 이후. 본부 내 OT와 함께 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턴이란 게 원래 전문의가 되기 위해 거치는 수련의 과정 가운데 첫 1년 동안의 의사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일반 회사에서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자세히 설명하기 어렵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피 말리는 회사 생활을 한다고 생각만 했지.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몰랐다.


철도공사는 여러 본부로 나뉘어 있고 본부마다 담당하는 지역이 다르다. 나는 구로역에 인턴으로 발령 났기에 수도권에 있는 본부에 속해 있었다. 철도공사에 대한 소개부터 안전, 서비스 등 여러 교육을 받고 본부 내 여러 곳을 견학하며 철도공사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소속 역인 구로역으로 출근하게 됐다.


같은 소속으로 인턴 생활했던 이들은 3명의 여자였다. 각자 개성이 강해 티격태격 싸우는 일이 많아 팀워크가 아주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언니’라 불리며 나름 잘 지냈다. 그들이 인턴 생활을 하자마자 맞이한 내 생일을 챙겨주기도 했고, 점심시간 동안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도 했으니.


내가 지원한 사무영업직은 철도공사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역에서 일하는 역무원, 전철을 타며 열차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뿐만 아니라 수송원, 로컬관제원, 그리고 여러 본부나 본사에서도 일할 수 있다. 부서와 직책에 따라 맡는 일도 다양해 퇴직할 때까지 다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와 일한 사람들은 다양한 일을 경험해 보라고 권한다. 직종이 다양하기에 여러 경험을 하면 나중에 그동안 익힌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많다는 것, 반복되는 일만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워 여러 일로 그런 경우를 피하라는 것 등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정규직이 되어서 한창 일할 때 말하는 것이지 철도에서 인턴이 주로 하는 일은 ‘보조’다. 역무원을 도와주는 것이다. 직원 입장에서 인턴에게 일을 맡기기에는 직원 입장에서 위험하고 피곤한 일들이 많다. 사고가 일어나도 잘 대처하지 못하고 금전적인 업무에서 실수하게 되면 직원들이 그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 그래서 직원과 인턴은 서로 불편하다. 직원은 무슨 일을 시키자니 잘못 처리하거나 다칠까 걱정된다. 인턴은 뭔가 더 해야 눈치가 덜 보이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바빠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빡빡한 인턴 일정이 그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 정규직이 되기 위해 봐야 했던 시험이 너무 많았다. 인턴 기간이 아닌 시험 기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험을 대부분 대전에 있는 본사에서 치렀기 때문에 소속 역에 있는 날보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험 보거나 실습하는 날이 더 많았다.


필기시험, 수송 시험, 매표 시험, 서비스 시험, PPT 발표, 면접 등 시험의 연속이지만 따로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하는 동안 틈틈이 공부하고 퇴근 후 집에서도 공부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게으름 피울 수도 있겠지만 정규직이 달린 일이니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인턴 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험공부가 아니라 눈치 보는 일이었다. 자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인턴의 리더이자 소통의 창구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가장 많고 혼자 남자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나는 같이 인턴 생활을 했던 친구들을 이끌기도 하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주로 나누기도 했다. 이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동료들은 나와 추구하는 것이 달랐다. 인턴 생활을 하며 나는 돈을 받는 만큼 우리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쉬는 시간을 줄이고 일을 더 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일을 줄이고 쉬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 했다. 쉬는 시간에 부족한 공부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험이라도 낮은 점수를 받게 된다면 내가 불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쉬는 장소는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일하는 역무실에서 앉아 쉬었기에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작게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일을 더 하자고 주장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그 눈총에서 벗어나고 우리에게 박힌 안 좋은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상관없으니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는 동료들을 보며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앓이하며 고생했다. 직원들이 나를 따로 불러 불편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시험을 잘 보고 싶고 불안하니까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인턴 생활은 개인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임을 강조하며 여차여차 설득하긴 했지만 이견을 조율하고 여러 가지 책임을 지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정신없던 인턴 기간을 시험별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순서대로 적어 놓은 것은 아니다)


<필기>

필기시험은 회사 내 규정인 운전취급규정, 광역철도운송약관, 여객운송약관의 내용으로 객관식 시험을 치렀다. 어디서 어떻게 문제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형식으로 공부했다. 생소한 용어들이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보다 먼저 인턴 생활을 거쳐 정규직이 된 선배 직원들의 도움으로 기출 문제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대로 문제가 나오기보다 문제 유형을 파악하고 감을 익히는 데 사용했다. 인턴 모두 모든 시험에 집중하겠지만 이 시험이 취소될 리가 없기에 다들 가장 공을 들였고 변별력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수송>

열차를 조성하거나 (지금은 많이 자동화되었지만) 선로전환기로 선로를 바꾸는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시험 내용은 열차 조성, 선로전환기 작동, 전호, 구문 시험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약 2주간 인천역에서 이 모든 것을 실습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구문 시험은 철도에서 쓰는 운전 용어를 외워 시험 감독관이 제시하는 용어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면 되는 시험이었다. 시험 중 가장 준비하기 힘들었던 것이 구문 시험이었다. 도무지 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퇴근길에 앞면에는 용어를 적고 뒷면에는 해설을 적어 놓은 단어장을 보며 달달 외웠다. 매일 하니 랩 가사 외우듯 되어 시험장에서 묻는 족족 대답할 수 있었고 감독관이 신기했는지 남들보다 몇 개 더 물어봐 난감했다.


이 기간은 다른 역 인턴들과도 함께 실습했는데 실습보다 점심시간마다 차이나타운의 짜장면 가게를 탐방했던 기억과 퇴근 후 회식했던 기억이 더 크다.


<매표>

제시한 상황에 맞게 KTX, 새마을, 무궁화 등 열차표를 끊어주는 시험이었다. 장애인, 노인 할인, 단체 할인 등 여러 할인과 환불하는 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기본적으로 매표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전철만 다니는 역은 이 매표 프로그램이 있지 않아 연습할 수 없어 프로그램이 있는 역에 가서 배워야 했다. 나는 광명역과 안양역에 가서 직접 고객들에게 표를 팔며 익혔다. 다른 사람이 연습할 때는 표 사러 오는 사람이 없어 직접 상황을 제시하며 모의로 표를 끊는 시늉만 했지만 내가 창구에 앉으면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것처럼 사람이 몰려와 실제로 표를 팔아야 했다. 잘못 표를 끊을까 걱정되어 진땀을 뺐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다양한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장 지루하지 않게 공부했던 시험이었다. 


<서비스>

인사법, 안내법 등 사내에 있는 서비스 매뉴얼 위주로 공부해 상황 제시에 따라 행동하는 시험이었다. 다른 시험보다 외워야 할 내용이 적었고 이미 고객 응대를 하며 몸에 익혔기 때문에 가장 연습이나 준비 과정 없이 치를 수 있었다.


<PPT>

본부 발표 PPT, 본사 발표 PPT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본부 PPT는 혼자서 만들어 발표하는 시험이었는데 시간 관계상 발표 없이 제출하고 채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슬라이드 수 제한이 있어 내용을 덜어내는데 골치 아팠다. 


본사 PTT는 본사에 전국 인턴이 모두 모여 무작위로 조를 나눠 발표하는 시험이었다.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과 한다면 호흡이 잘 맞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과 조를 이루니 성향과 생각이 달라 의견이 모이기는커녕 갈등이 심해졌다. 점수를 어떻게 주는지 잘 모르기에 다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내가 튀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는지 다들 눈에 띄는 일을 하고 싶어 했고 자기 아이디어가 반영되길 바랐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최악의 시험이었다.


<면접>

가장 긴장할 줄 알았는데 가장 편안하게 임했던 시험이었다. 최후의 시험이었기에 이제 끝이라는 생각으로 가장 자신 있게 치를 수 있었다. 다대다 면접으로 치렀는데 같은 조에 친하게 지내던 누나가 있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와 이를 참느라 힘들었다. 인턴 면접처럼 이름을 숨기고 부여된 번호를 사용했고 면접관이 정해주는 순서대로 공통된 질문에 답했다. 돌이켜보면 진지하게 임했어야 했는데 미친 척, 여유 있는 척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도 장난 섞어가며 대답했다. 당시 마음은 편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산점>

정직원이 되기 위해서 가산점을 챙기는 것은 필수였다. 한국사능력시험 자격증을 등급과 상관없이 소지하고 있으면 가산점이 주어졌다. 가산점 여부에 따라 등락이 바뀌기도 한다고 해서 미리 가지고 있던 사람은 수월하게 다른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격증이 없는 사람은 가산점 확보를 위해 한국사 시험까지 봐야 했기 때문에 더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수료

4월부터 6월 초까지 정신없이 달리고 나니 어느새 수료식 날이 되었다. 수료증을 받고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에 갔다. 오후에 최종 합격 발표를 학교에서 보고 싶었다. 졸업식 후 교문을 벗어나면서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기에 백수 생활의 마침표도 이곳에서 찍고 싶었다. 마음은 홀가분했다. 친한 형과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담담히 결과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어 결과 확인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합격. 하이파이브로 순간의 짜릿함을 함께했다. 그간 고생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로역에서 같이 인턴 생활한 친구들도 한 명만 빼고 모두 합격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이 아닐지 걱정했다. 하지만 떨어진 친구는 철도공사 말고도 다른 회사도 같이 준비했는데 그곳에 붙어 결과적으로 모두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본 취업 성공의 맛은 대학교 합격자 발표만큼 달콤했다. 정규직으로 일하자마자 그 맛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험만 치르다 끝난 인턴 생활이었지만 같이 일하며 지켜본 직원들의 모습, 그들이 알려준 업무 비법 등은 내 안에 남아 여전히 활용 중이다. 받은 도움을 기억하며 새로 들어오는 인턴들에게 잘해주려고 하는데 말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만일 너무나 해이해져 버린 내가 훗날 다시 이 글을 보게 되면 다시 마음잡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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