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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May 18. 2021

시작의 기억

노동요 - 철도 인생

신입사원 연수

최종 합격 후 강원도에 있는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간 고생했으니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서 쉬게 해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에 따라 유명 인사들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인턴 교육 내내 들었던 것들을 복습하는 시간도 가졌다. 지루함은 덤이었다. 클라이맥스는 기업의 신입 사원들의 단합된 모습을 본다며 열심히 준비했던 일이다. 가끔 뉴스 같은 데 나오던 그 일이었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 앞에서 선보일 연극, 춤, 노래 같은 걸 1주일 내내 준비했다. 


그래도 시간이 잘 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분임장’이란 것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학급 수준 인원의 대표가 되어 질서정연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고 총괄 지휘하는 직원이 요구하는 것을 전달하거나 수행하는 일이었다. 반장도 한 번 안 해본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큰 결심이었다. 그런데도 자원했던 이유는 낯을 가려서 처음 보는 이들과 일주일간 생활하면 어색할 것 같아 차라리 바쁘게 움직이는 게 시간이 빠르게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성인이라서 그런 것인지, 신입 직원들의 패기가 남아서 그런 것인지 아예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서 감동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종종 통제가 안 되거나 직원이 일을 시키려고 자주 부르는 바람에 계속 들락날락해 힘들기도 했다.


연수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른 아침에 바다에 나가 헬륨 풍선에 각자의 소망을 적어 날려 보낸 행사였다. 드라마 <미생>의 OST를 들으며 모든 신입 사원이 풍선을 날릴 때 맞았던 그 햇살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정말 시작이라는 생각과 함께 느슨해진 마음을 다시 잡았다.


연수를 마치고 며칠간 발령 난 근무지에 가서 일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신입사원의 마음가짐이 너무나 컸던 탓인지 근무하는 날 일을 잘 못 할 것 같아 미리 배워두고 싶었다. 근무하는 직원 옆에서 어떻게 하는 건지 지켜보고 이것저것 수첩에 적었다. 돈을 묶는 것도, 기계를 다루는 것도 난생처음이라 어색하기만 했다.


첫 근무 시작

그리고 첫 근무를 하는 날. 나는 발령 첫날부터 야간 근무를 하게 됐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양말과 옷이 다 젖어버려 찝찝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 낯선 곳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에 겁이 났다. 긴장 상태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시간은 금방 갔다. 휴식 시간이 주어져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는데 옷도 안 나와서 그냥 속옷 바람으로 잠을 청해야 했다. 항상 자기 전에 깨끗이 씻어야 잠이 잘 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냥 군대 훈련 왔다고 생각했다.


방의 상태는 정말 안 좋았다. 한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건지 방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어 바닥을 발로 밟으니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모기는 뭐가 그리 많은지. 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신나게 내 몸에 달라붙는 녀석들을 피하거나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헌혈 봉사의 마음을 갖고 눈을 붙였다. 잠을 설치고 온몸이 퉁퉁 부어버렸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다음 야간근무를 위해 잠깐 쉬었다. 하지만 적응이 안 돼 집에서도 잠을 설쳤다. 늘 자던 시간과 다른 시간에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잠을 잔다는 게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신이 평소보다 반쯤 붕 뜬 느낌이었다. 그래도 한 시간 반 일찍 출근해 방을 청소했다. 방이 깔끔해지면 마음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살충제도 하나 가져가 방에 잔뜩 뿌렸고 방향제를 설치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회사 생활이라면 9 to 6라는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는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용만 했지 내가 그 환경에서 일한다는 것, 그 세계의 일을 내가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어색하게 다가왔다. 여기에 배웠는데도 뭐가 뭔지 모르는 신입사원 특유의 어리바리함. 이 모든 불편한 감정을 털어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다가왔다.


여름 특유의 습기에 생기는 끈적끈적함, 뜨거운 공기.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해가 유독 심하게 느껴졌던 것은 실제로 날씨가 그랬을 수도 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진땀을 흘렸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떠올릴 때마다 그 이미지가 생각난다. 마치 아다치 미츠루 작가의 만화 속 학생들의 청춘을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여름 같은 느낌? 비교하기엔 이제 내가 나이가 너무 많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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