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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Jan 25. 2022

인생은 롤플레잉 게임이 아니야


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롤플레잉 게임은 내 성향에 잘 맞는 게임이었다. 롤플레잉 게임은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것을 알려줬다. 대부분 롤플레잉 게임이 흔히 말하는 ‘노가다’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그 과정이 지루하고 힘들다. 하지만 이를 견디며 꾸준히 레벨을 올리다 보면 그만큼 강해진다. 강해진 만큼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수월해졌다. 이 과정을 거치면 성공의 길로 갈 수 있었다.


노력하면 성공한다. 내게 게임은 단순한 오락 행위가 아닌 가치관, 신념을 잡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길잡이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끈기를 알려줬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길러줬다. 아무리 계속 실패해도 다양한 시도로 결국 해내면서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게임만이 아니라 학업 등 내 주변 일이 그렇게 풀렸기 때문에 앞으로 모든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일이 잘 풀릴 때마다 내 기준을 남들에게 증명하는 것 같아 자부심을 느꼈다. 그 신념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인생이 롤플레잉 게임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통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노력의 부족인지 방식의 잘못인지 분석하고 새로 마음을 잡아서 다시 도전해도 큰 변화가 없었다. 내 방식이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 흘러가는 고전 롤플레잉 방식이라면 현실은 과금제가 포함된 실시간 게임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현금 결제로 능력과 도구를 강화하는 ‘현질’로 노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예전에는 결말이 있고 그 결말이 예상 가능했다면 현실은 결말을 알 수 없다. 결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출발선이 다르고 가지고 있는 것도 다르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결과가 뒤집히는 일은 드물다.


게임 속 시간은 흐름이 현실보다 느리다. 현실은 눈 깜짝하면 하루가 지나는 것처럼 빠르지만 게임은 1초가 10년 같다. 내가 현실에서 게임으로 하루를 보내도 게임 속 환경은 여전히 해가 중천이다. 그래서 내게 더 투자하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성공이라는 결말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실패가 이후 성공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 기회가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노력에 비례하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내 가치관이 흔들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일까? 평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되뇌었고 의지했다.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목표에 도달하리라 생각했고 바랐다. 하지만 점점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 맞는지 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고 나를 의심했다. 현실에 대한 자각이 나를 냉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 번씩 성공을 거둬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이거나 반전의 기회를 마련하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이 연속적인 실패다. 이런 무한 반복 속에서 재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좌절감에 싸인 요즘 ‘영웅전설1’과 ‘영웅전설2’라는 게임을 끝까지 완료했다. 일본 팔콤사의 대표작이자 초등학교 다닐 때 ‘게임 피아’라는 잡지의 부록으로 나왔던 게임이었다. 한창 게임에 빠져있을 때 하면 되지 왜 지금 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연이 길다. 그 당시 1편은 끝까지 해낼 수 있었지만, 마지막 맵이 너무 어려워 포기해버렸다. 2편은 맵을 통해 이곳저곳을 이동하다 몬스터를 만났을 때 전투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고 게임이 튕겨버리는 버그 때문에 게임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이후 나온 잡지 부록 CD에 패치 파일이 동봉되긴 했지만 어린 나이에 하는 방법을 몰라 포기했다)


‘언젠가는 하겠지.’ 생각만 하다가 이렇게 세월이 흘러버렸다. 마음 편히 잊고 살 수 있음에도 부채 의식 같은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계속 되뇌느니 차라리 끝을 보자. 여유가 생긴 요즘 마음을 잡고 도전해 이제야 엔딩을 본 것이었다. 요즘 게임과 달리 지루하게 반복되는 전투가 너무 지겨워 내려놓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내 자존심이 게임을 포기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파고와 대국에서 한 번이라도 승리하겠다는 이세돌 9단의 집념이 이렇지 않았을까 착각해본다.


인생과 롤플레잉 게임이 같은 것은 아니다. 알고 있었는데 인정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키지는 않지만 차가운 현실을 인정하려 한다. 하지만 내 모든 삶의 방식은 아직 바꾸지는 않으려 한다. 오랜 시간 그냥 두었던 게임의 끝을 볼 때 느꼈던 개운함. 어쩌면 집요한 그 모습을 가지고 버텨보려 한다. 예전처럼 묵묵히 버텼을 때 얻는 것도 있지 않을까. 게임을 하며 오랜만에 느꼈던 쾌감으로 흔들렸던 마음을 붙잡아 보려 한다. 결국, 이 과정도 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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