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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Feb 07. 2022

배려의 정도

쌀쌀한 기운이 도는 가을 어느 날, 아파트 단지를 걷는데 애벌레들이 인도를 가로질러 기어가고 있었다.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 벌레의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대이동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그 여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피해 다녔다. 그러던 중 몇몇은 이미 누군가에게 짓밟혀 죽어있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을 보며 더 피하려고 했다. 태어나면 죽는 것이 순리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배려해준다면 지금 당장 목숨을 잃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어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다. 그 길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나는 땅을 보며 걸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그 배려는 습관처럼 이어져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잠깐 땅을 보며 걸은 적이 있었다. 자신감 없어 보인다며 앞을 보고 다니라는 꾸중과 조언에 결국 고치긴 했지만 나는 일부러 땅을 보고 걸었다. 가끔 동전을 줍는 행운을 겪다 보니 또 주울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에 부풀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밑에 있는 것들을 밟는 것이 불편했다. 길가에 널브러진 침, 껌, 변, 쓰레기 등을 밟고 느끼는 찝찝함이 싫었다. 일부러 줍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싫으면 남도 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아무리 주워도 내가 줍는 쓰레기보다 버려진 쓰레기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며 줍는 것을 포기하고 나라도 버리지 않기로 바꿨다. 어린아이였던 내 나름의 타협이었다.


혼자만의 타협이 마음에 걸렸는지 몰라도 학교 조회 마치고 교문 밖에서 잠깐 쓰레기를 주울 때나 군대 아침 점호 마치고 연병장 돌을 주울 때. 불평하기보다 더 열심히 주우려 했다. 주변이 깔끔해지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불확실성에서 발생하는 문제에서 벗어날 기회라는 생각이 있었다. 결코, 나에게만 좋은 일이 아닌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짧은 시간 동안 하는 일이었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른 만큼 배려의 정도도 다르다.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땅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듯 내 마음가짐이 이해되지 않고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개 온갖 것들 신경 쓰면 어떻게 살겠느냐며 편히 살자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 상관없거나 직접적 연관이 없는 불편함에는 여유롭지만, 자신과 관련 있는 불편함에는 매우 예민하다. 규모가 작은 층간 소음, 흡연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심지어 폭행과 살인이 빈번히 일어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집 앞 화단이나 인도에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버리고 남의 차가 나오기 힘들게 주차한 적은 없었는가. 그 빈도가 잦으면 익숙함에 젖어 당연한 듯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 있을지 모른다. 그게 누군가를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은 모른 채.


영화 <기생충>이 흥행하며 ‘선을 넘는다’는 영화 속 대사도 유행했다. 상대의 민감한 영역을 침범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고 그 선을 넘었을 때 충돌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직접 일러주지 않는 이상 보통의 눈치로는 이 선을 간파하기 쉽지 않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와 견디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남에게 선을 넘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선을 넘어버린 것은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배려하는 게 좋을까. 나를 잊어버릴 필요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상대를 걱정하며 사는 게 나은 것 같다. 선을 그어 놓고 그 이상을 넘지 않되 조금 더 여유 공간을 남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자유를 누리더라도 100까지 허용되면 90~80 이렇게만 누리는 것이다. 미련할지 모르더라도 말이다. 100이면 100 모두 챙기면 좋은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수치는 물건의 무게, 길이 등 눈에 보이는 치수로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0.1도 결국 100을 넘는 거 아닌가. 나도 모르게 선을 넘을 수밖에 없고 넘었을 때 아무런 제지가 없으면 마음 편히 그 이상을 넘으려는 유혹을 겪는 게 인간이다.


그렇다고 이만큼 했으니 됐다는 식의 마음가짐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배려라는 것이 행하는 것에 오롯이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과정과 결과 등을 고려하며 하는 것을 진정 배려라 여길 수 있는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과정에 집중하는 배려는 '계산'에 가깝고 배려 이후 돌아올 대가를 바라는 배려는 '작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출근길에 도로교통 상황판을 보니 전날 사망자가 1명이고 부상자가 14명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러게 많은 사상자가 있었는데 서울, 우리나라, 전 세계로 영역을 넓힌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세상을 떠났을까.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우리는 먼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능력의 특별함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존재 가치에 특별함은 결국 차이가 없다. ‘나’는 고귀하지만 나만 중요하고 누려야 하지만 남은 안중에 없는 모습은 편협한 시각이다. 부스러기들끼리도 배려 없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코로나19라는 맞서야 할 공공의 적이 있음에도 타인의 자유와 누릴 혜택은 무시한 채 나만 생각하는 모습들. 남의 삶에 피해를 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우리네 본성에 경이로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도 알게 모르게 선을 넘으며 살았을 것이다. 내 생각만 하다 남에게 해를 준 적이 없는지 한번 되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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