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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Nov 13. 2019

윤택한 사회를 꿈꾸며

‘민주주의’(民主主義, democracy)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demokratia’이다. 그 의미는 민중(民衆)이라는 뜻의 ‘demos’와 통치(統治)라는 뜻의 ‘kratos’가 합쳐진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중들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장 민주주의를 짧고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문구는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 속에 있다. 바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이다. 링컨 대통령이 말한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국가만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정치에는 권력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것은 잘못되거나 그릇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을 가진 경우 다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이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힘을 가진 정부는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국민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는 한 사람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권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진영재에 따르면 “권위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 쌍방향적인 것”이다. 이는 정부는 물론 국민에게도 권력을 행사할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국민 스스로 국가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정치를 하도록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쌍방향적인 권력 행사와 소통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급격한 변화를 자주 맞이한 국가이다. 임시정부부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후 한국전쟁, 쿠데타, 외환위기 등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양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나 경제 부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인 발전을 겪었다. 빠른 발전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개헌을 했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자금 마련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일제 강점 당시의 문제를 흐지부지하게 해결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국민은 정부가 잘못된 모습을 보인다고 판단하면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이것은 올바른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 시민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과거와 다른 모습을 자주 보인다. 목소리를 내려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비난하는 국민이 있다. 단합된 과거와 달리 각자 따로 행동하는 모습이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인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구축이 필요하다. 시민사회는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시민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코헨과 아라토는 “시민사회는 국가와 경제로부터 구분되고 다음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회영역에 관한 하나의 규범적 모델이라고 말한다. 첫째, 다원성 : 가족, 비공식 집단, 자발적 결사체, 둘째, 공론장 : 문화와 의사소통의 제도들, 셋째, 사생활 : 개인의 자기발전과 도덕적 선택의 영역, 넷째, 합법성: 국가와 경제로부터 다원성, 사생활, 공론장을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법과 기본권의 구조. 이들 구조가 함께 어우러져서 근대의 분화된 시민사회가 제도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장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민사회는 개별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과 유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서구국가와 비교해 다른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인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의 정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최장집은 “서구에서 시민사회는 공적 권위를 대변했던 국가에 반해 사적 영역 내지 상업 사회의 옹호를 위한 개념이자 이론화의 결과였다. 그래서 서구의 시민사회는 자유주의와 큰 연관성을 갖는다. 국가와 시민사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경계는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고, 서구의 시민사회는 국가권력이 사적 영역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하는 개념이었다. 요컨대 국가의 공적 권력의 확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자유주의가 서구 시민사회의 출발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한국에서 시민사회는 재산권 최우선의 원리나 시장과 경제적 사적 이익을 옹호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중앙 집중화된 정치 권력에 반해 민주주의와 민주적 공적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그 핵심 내용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시민사회는 약한 자유주의적 내용을 갖지만, 반면에 매우 강한 민주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시민사회는 ‘시민들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다. 시민사회는 국가에 필요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가와 별개의 위치에서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다. 국가에 속해 국가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시민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특히 부합한다. 대한민국 시민사회는 민주화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구실을 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대한민국의 정부와 시민사회는 서로 부딪치며 발전하는 대립과 관계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정부의 강압적 모습에 의해 무너지지 않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민사회 형성에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남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받을 때, 둘째, 공동체 전체가 충분히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첫 번째 전제 조건을 건 이유로 시민은 민중이 아니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시민이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들은 시민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불려야 한다. 사전적 정의로 봤을 때 민중(民衆)은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이른다. 이는 구성체와 피지배 계급에 불과하다. 피지배 계급은 지배 계급의 권력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시민(市民)은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 권력 창출의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지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공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을 뜻한다.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있고, 자발적으로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을 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에 대한 첫 번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두 번째 전제 조건을 건 이유로 사회 유지를 하려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사회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의 선호, 이익만 추구하여 타인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 가치관 공유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60~80년대 대한민국 시민사회

최장집은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가에 반하는 시민사회’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때의 시민사회는 국가 대 시민사회라는 대립적인 관계를 표징하면서 권위주의 국가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가져온 사회적 보루이자 기반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60~80년대 대한민국은 국민이 민중에서 시민이 되는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은 국가, 사회의 구성원인 민중의 역할에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찾기 위해 움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확실히 자리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독재 성향의 정부가 정권을 갖고 있었고 법률이나 정책은 국민 대다수의 의지를 반영하기보다 정치계나 경제계의 소수를 위한 내용이 많았다. 국민이 다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는 공통적인 목표가 있었고 이를 위해 ‘시민불복종’의 모습을 보였다.


존 롤스는 시민불복종을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라고 정의한다. 오현철은 롤스의 정의에 따른 시민불복종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시민불복종은 공공의 행위로서 공공 원칙에 관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공공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심사숙고된 비합법 항의 행위로서 개인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행위여야 한다. 둘째, 시민불복종은 비폭력적이다. 상해하고 해칠 가능성이 있는 폭력 행위에 가담하는 행위는 시민불복종과 양립할 수 없다.


대한민국 시민불복종의 예로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한 4·19 혁명, 광주에서 계엄 철폐를 외친 5·18 항쟁, 4·13 호헌 조치 철폐를 요구한 6월 항쟁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공공의 이익을 위했고, 비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위에서 제시한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국가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국민이 이를 개선해야 한다. 정치는 잘못되거나 그르친 것을 올바르게 고치고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한자로 구성되어있다. 또 이스턴은 권력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속성을 포괄하여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행위라고 정의했다. 올바른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 권위를 얻기 위해 국민은 끊임없는 감시와 저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시민불복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대한민국 시민사회의 역행

과거의 시민사회 형성과 운동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불복종 형태의 모습만이 목소리를 낼 유일한 방법이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방식의 참여로 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지적할 수 없는 정당한 방법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시민사회는 과거와 달리 퇴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참여보다 방관의 자세를 갖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참여를 유도하는 형식의 모습은 대학에서도 나타났다.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의 이름을 가진 대학교 대자보의 유행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전부터 대학의 게시판에는 사회문제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자보가 많이 있었다. 반면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적힌 말들은 특정 목적을 지닌 이야기를 사용하기보다 대학생들이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공감만 사고 끝이 나는 모습이다. 시간이 갈수록 안녕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자보는 점점 모습을 감췄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변하지 않는다는 실망으로 돌아갔고, 다시 상당수가 더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국민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례는 ‘투표의 참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민이 간단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방법이 투표다. 투표는 시민의 의무와 권리이며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진영재는 “민주사회에서 사는 시민들은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그들의 시민의식을 고양시킨다.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자신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유권자들에게 국가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가장 큰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투표를 통해 정책이 결정되거나 목소리를 대신해 낼 대표자를 뽑지만 당장 효과가 없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다. 


문상석은 “한국의 평균 투표율은 56.9%로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지난 10년간 투표율 비교에서 볼 때, 26번째로 낮은 국가에 속한다”고 말한다. 19대 국회의원 선거는 46.2%를 기록한 18대보다는 높은 54.2%를 기록했지만 역대 국회의원 선거 중 두 번째로 낮은 투표율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국민이 정치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자신의 권리를 내세울 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앞선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재 시민사회는 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하고, 그 목소리가 확대되지 못한 채 소수만 활동한다는 것이다. 권위를 얻고 유지하는 것은 공동체가 갖추어졌을 때 가능하고, 그 공동체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무관심, 목소리를 내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정해진 생각, 이익이 될 게 없다는 자신만의 합리적 계산 등이 참여를 막고 있다. 또 목소리를 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국민은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 제 갈 길 바쁜 모습, 참여 없이 불평만 하는 모습이 목소리를 낼 공동체 형성과 자신의 권위를 가질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불평하는 것을 반복한다. 

     

윤택한 사회를 꿈꾸며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데는 국민의 많은 희생과 저항이 있었다. 그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현재의 시민사회는 활성화되지 않고 나태한 것처럼 보인다.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국민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계속 더 나은 정치를 만들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권리와 이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변화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변화를 일으키려면 목소리를 각인시키는 단계가 필요하다. 계속 목소리를 낼 때 정치인들도 귀를 기울인다.


소수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결사체 형성을 통해 수를 늘려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다수의 목소리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영역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이 공공영역은 자유롭게 소통하고 참여하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과 달리 서구사회에서는 과거부터 이미 공공영역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민주주의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커피하우스와 살롱에서 신분 차이 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공공영역에 참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대한민국 역시 서구의 사례를 본받아 다수가 참여할 수 있는 공공영역 형성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 개개인은 시민사회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모습이 필요하다. ‘나 하나쯤’이라는 생각으로 투표나 운동 참여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목소리를 내지 않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이런 모습에서 발생하는 투표율 감소나 잘못된 대표자의 선출은 자신의 권리 행사와 이익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에서 시민사회 형성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는 무관심도 있지만, 상대를 부정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공공영역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참여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의 모습이 필요하다. 다른 이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만 옳다고 여기고 주장하는 태도는 더 많은 생각의 공유를 막고 공동체 형성을 방해한다.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국민의 권익 유지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현재의 모습에서 정체하지 말고 변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더 나은 사회는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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