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작 예능을 보며
PD의 꿈을 품었을 때 방송 관련 수업을 여러 개 들었다. 커리큘럼은 비슷해도 선생님마다 자기 생각은 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업 시간표에 항상 빠지지 않고 있던 시간은 기획안 제작이었다. 제시어를 준다거나 특정 시간에 어울린다거나 여러 조건을 걸어 그에 걸맞은 방송을 만들어야 했다. 마치 PD가 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기획안에 대한 선생님들의 평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것을 잘했다고 하기도 하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못 했다고 하기도 했다. 또 “새롭지 않다.”, “너무 새롭다.” 등 너무 극과 극인 평이 많아 내 것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기준을 잡기 어려웠다.
‘B급 감성’, ‘4차원’ 지나친 새로움을 지닌 기획은 이런 평을 받는다. ‘익숙하다.’, ‘비슷하다.’ 새로움이 조금만 덜하면 이런 식의 평을 받는다. 그러면 학생 대다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집에 돌아와 TV를 켜 그 사람들의 방송을 보면서 생각한다. ‘자기도 참신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은 혼란해진다. 이런 학생들에게 수업에서 선생님들이 해답으로 제시하는 기획은 대개 그랬다. “어디서 본 듯한 방송을 섞거나 조금만 비틀어라.”
어쩌면 방송 기획안은 입사용과 현직용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직 PD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정답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겠지만) 방송국 입사를 노리는 사람은 현직자들의 눈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신입으로서 가능성과 창의성을 보여주려면 기존 프로그램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방송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현직자로서 새로운 방송을 준비한다면 대중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에 참신하되 너무 튀지 않고 장수하면서 방송국 주머니 사정과 광고를 끌어올 만한 방송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즐겨 보는 방송만 찾아보지 않고 새로운 방송이 나오면 1화 이상은 꼭 보는 편이다. 다른 프로그램과 뭐가 다른지 어디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쏟아져 나오는 축구선수 모두가 리오넬 메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방송가를 뒤흔들 만한 방송이 매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본 방송의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지 않은 방송. 이런 방송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방송의 패턴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같은 장르의 여러 프로그램을 조합하기’, ‘기존 프로그램의 소재만 비틀기’, ‘다른 장르를 합치기’
MBN의 <전현무계획>은 같은 장르의 여러 프로그램을 조합한 방송 중 하나다. 전현무가 출연했던 tvN의 <수요미식회>와 곽튜브가 출연했던 <곽준빈의 세계 기사식당>. 진행 잘하는 사람과 요즘 잘나가는 사람이 출연했던 방송을 합쳐 만든 것처럼 보이는 방송이다. 단순히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 기행하는 요소와 음식이나 재료, 식당 사장의 이야기 등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넣어 기시감을 무마하려 한다. 여기에 또 다른 게스트를 추가해 함께 먹고 이야기 나누는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의 요소까지 추가했다.
이 방송은 보여주고 싶은 건 많고 욕심내서 색달라 보이고 싶은데 어디서 본 것 같으면서도 그 재미를 살리지 못하는 방송이다. 여러 가지를 조합했지만, 프로그램의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 진짜 무계획 방송이다. 전현무와 곽튜브, 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울릴지 몰라도 먹는 것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전현무와 곽튜브의 먹방은 느낌이 다르다. 전현무는 방송을 통해 국내의 맛집 음식을 즐기는 이미지를 쌓았다면 곽튜브가 방송으로 보여주며 쌓은 이미지는 해외 여행 중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맛집보다는 그 나라 음식을 먹는 모습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식욕을 자극하거나 맛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지 말고 미식으로 갈 것인지, 푸드파이터처럼 많이 먹는 것으로 갈 것인지 방향을 먼저 잡았어야 했다.
기존 프로그램의 소재만 비튼 것은 MBC <대학제전: 소년선수촌>이다. 최근 몸 쓰면서 화제에 오른 방송은 넷플릭스 <피지컬: 100>의 대학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최고의 신체능력을 갖췄는지 어느 체대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가리기에 단순하지만, 그 취지와 보여줄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아무리 종목과 규칙이 달라도 기시감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고 누군지 전혀 모르는 학생들의 모습에 한 번 더 흥미가 떨어진다. 아무리 다르다고 주장해도 화제작 <피지컬: 100>의 아류작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다른 장르를 합친 것은 tvN <아파트404>다. 복고와 추리를 합한 프로그램으로 tvN의 다른 추리 프로그램이었던 <식스센스>, JTBC의 <크라임씬>의 역할 요소가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대다수가 이곳저곳 움직이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SBS <런닝맨>과 tvN <대탈출>의 느낌도 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소재를 활용했기에 처음에는 참신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출연자들의 기존 출연작에서 모습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추리 예능에 알맞아 보이지 않는 게임이 너무 많아 스스로 정체성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다른 장르를 합칠 때는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추리를 내세웠지만 게임 위주의 방송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최근 새로 나온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결국에는 진짜 새로운 방송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이라고 나온 방송도 대개 기존 방송과 비슷하고 ‘인물 차력 쇼’에 성패가 갈린다는 것이었다. 유재석, 전현무 등 오래전부터 진행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 이들과 호흡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여주느냐에 따라 방송 유지가 결정된다. 새로움보다는 재미, 그 재미도 방송 자체의 재미가 아닌 출연자의 능력에 의지한 재미가 우선이다. 새로운 방송이 없다, 새로운 얼굴이 없다는 말은 고민보다는 핑계에 가까운 말이다. 이미 방송국은 방송 자체보다 방송 출연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함에 빠져 있다. 마치 전술보다는 선수 기량에 의존한 클린스만 축구와 같다.
미국의 사회과학자 하버트 사이먼은 한 연구에서 두 가지 실험을 했다. 첫 번째 실험은 체스의 고수인 A그룹과 체스를 전혀 모르는 B그룹을 대상으로 체스 게임을 보여주고 일정 시간 후 체스의 기보(체스 게임의 흐름을 글로써 표현하는 방법)를 적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고수인 A그룹은 완벽하게 기억했으나 체스를 모르는 B그룹 대부분은 거의 틀리고 30% 정도만 기억했다. 두 번째는 체스 게임 규칙에 맞지 않는 엉터리 게임을 주고 첫 번째 실험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정 시간 후 맞히는 실험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첫 번째와 정반대였다. A그룹의 고수들은 거의 다 틀렸지만, 비전문가라 볼 수 있는 B그룹은 30~40명이 기보를 맞혔다. 익숙함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여러 번 PD 면접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듯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잘 설명만 한다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그램도 그림을 보여주듯 명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압박과 긴장의 늪에 빠진 구직자가 얼마나 침착하고 명쾌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지, 또 설명을 듣는 이가 이를 이해해 줄 기준과 정도가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PD도 비슷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익숙한 것에서만 답을 찾다 보니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모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못하면서 지망하는 자에게도 관대하지 못한 모습을 보며 방송 만드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망해도 한번 저질러보는 유튜브 채널의 방송이 더 참신해 보이고 눈이 갈 때가 많아진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