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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동요

예스맨이 되어야 하는 삶

노동요 - 철도 인생

by 와칸다 포에버

내가 생각해도 나는 모난 성격이다. 반골 기질이 있어 수긍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음 편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내가 피해를 보더라도 할 말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자기는 못할 말 해줘서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름 기분 좋아지라고 해준 말 같고 분위기 망치는 이상한 사람으로 다들 여겼을 것이다.


세월 탓인지 자리 탓인지 나라는 사람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라고 여기면 어떻게든 아니라고 말하며 내 의견을 관철하고 저항했을 텐데 요즘은 웬만한 일에 모두 오케이를 외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결과가 어느 정도 가늠되는데도 반대하는 일이 없다. 지금의 나를 만나기 전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건방지게 생각했을 것인지에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


나를 고 평가하는지, 아니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본부의 상사들은 일단 시키고 본다. 처음에는 여러 근거를 내세우며 재고나 반대 의견을 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떻게든 해내라는 말이었다. 어떤 것에 관해 물으면 바로 답이 나와야 한다. 나도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짧은 시간 내에 알아내서 가르쳐줘야 한다. 해당 업무를 서로 알아가고 더욱 전문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으나 일하기도 바쁜데 자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모되는 것 같아 허탈하기도 하다.


명령이다 보니 어떻게든 해야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주변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해도 목적 달성이 우선이다. “하니까 되잖아.” 이 대답으로 결말이 나면 일이 마무리 됐음에 안도하고 동시에 이 소리 들으려고 고생했는지 회한이 밀려온다. 부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유예기간이 없다. 내가 맡은 업무가 능숙해질 시간은 없다. 그 시간은 내가 따로 마련해야 한다. 야근을 하든 주말에 일하든 업무 외 시간까지 동원하며 내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한 소속에만 머물러 그 소속에서 하는 하나의 일 중 일부분을 맡다가 하나의 일을 온전히 하는 것을 넘어 각자 그 일을 수행하는 여러 소속을 관리하는 일을 하니 정신이 없다. 더 시야를 넓히고 신경 쓰는 것도 많아야 하며 내 선택과 실행에 따라 일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요즘 같은 폭염이 극성인 여름이면 시원한 비가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수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내리더라도 조금 얌전히 내렸으면 한다. 호우주의보라도 발령 나면 ‘재해대책본부’라는 것이 발동되어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8시간을 당직 근무처럼 보내야 한다. 적당히 비가 내리면 상관없지만 지구온난화가 진행 중인 지금 세상에서 비는 집중호우 형태로 내리는 때가 잦아지니 호우주의보가 자주 발령이 난다. 업무 중에 재해대책본부가 생기면 내 일이 쌓여도 일보다 그것이 우선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문제는 내가 집에 있는 새벽에도 발동되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밤에 잠을 자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출근하라는 전화였다. 이미 열차도 다니지 않는 심야라 나는 5만 원 돈을 내고 택시로 가야 했다. 호우주의보라는데 비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뒤 얼마 안 가 호우주의보가 해제되어 싱겁게 다시 집에 돌아가야 했다. 나는 첫차가 운행될 때까지 기다리다 돌아갔다.


예전 같으면 이마저도 꼭 가야 하는지를 계속 물어보며 가지 않으려고 싸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욕은 했지만, 빈둥대는 것 하나 없이 재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어 출근하는 나를 보며 이제 진짜 회사 생활에 물들어 버렸고, NO가 아닌 YES를 외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이들 대부분이 나이를 먹고 사회에 적응할수록 그렇게 살아갔을 거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답답하게 여겼을 것이다. 할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당하고만 산다고. 정작 내가 그렇게 될 줄은 모른 채 말이다. 아, 샐러리맨의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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