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속의 소중함
‘보고 싶다’라는 감정이 든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삶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본디 적응의 동물이다. 새로움을 접할 때 처음에는 설렘의 감정에 부풀어 오른다. 수많은 처음들을 우리는 마음속에 설렘으로 지니고 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나를 떨리게 하던 그 설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의 일부분이 되기 마련이다.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인지되는 순간부터 은연중에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게 된다. 익숙함 속에서 내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설렘은 그 소중함을 잃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죽는다면, 당장 내일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혹자는 하지 못했던 것, 보지 못했던 것, 먹어보지 못했던 것 등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미 경험한 익숙한 순간들을 다시금 마주하고 싶다. 이미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려서 일상 속에서 까맣게 잊고 사는 순간들이 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연락마저도 뜸해져 버린 가족과 보내던 따뜻한 순간들, 이제는 서로의 시간이 달라서 마주하지 못하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던 푸른 순간들. 나는 그 순간들을 다시금 갈망하게 될 것 같다. 갑자기 그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일까?
소중함은 사실 "유효기간"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어떤 여행지를 가던지 설레는 마음을 품고 여행을 가고 그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설렘의 감정은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새로운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로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현실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좌석에 털썩 내려앉는 순간 느껴지는 크나큰 아쉬움들을 반복해서 경험해 본 결과, 사실은 며칠 뒤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 모든 순간들을 설레고 소중하고 귀한 순간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학 가는 친구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던 감정부터 연로해지신 조부모님을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싶어지는 감정.
얼마 남지 않은 '유효기간'이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또 볼 거니까.라는 익숙함이 묻어있는 문장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 자신에게 집중을 더 하게 되어있다. 내가 신경 쏟을 일이 점점 많아질수록 주위 사람들, 가족들조차도 챙기기 버거워진다. 일상의 소줌함, 범사에 감사함을 항상 지니고 살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지만, 무거운 현실 속에서 그 말을 계속 되새기며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가끔은 우리 관계들 사이에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보려고 한다.
익숙해져 버린 관계들이었는데 한국을 떠나온 지금은 그 관계들의 소중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인간은 공동체라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관계성이라는 특성이 아주 짙은 동물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행위는 우리가 평생 동안 반복해야 하는 행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학창 시절처럼 매일같이 친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렵다. 해외에 있다 보니 한국에서의 인연들이 옅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문장처럼 이제 눈앞에 있지 않다 보니 사람들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점점 옅어지게 되어있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행위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일이 생겨 연락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한국에 갔을 때, 기꺼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는 사람들,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로 서운해하지 않고 꼭 안부 연락을 주는 사람들. 1년에 한 번뿐인 만남 혹은 전화 한 통이지만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정말로 짧은 만남과 통화지만, 그 희소성이 이따금씩 그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들은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들이다. 상대방이 보고 싶다는 감정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내 마음속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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