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혼모노 단편집 1
intro
성해나의 혼모노 단편집은 시대유감을, 더 정확히는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병리를 날카롭게 진단한다. 단편임에도 촘촘한 구성과 몰입감으로 완성된 7편을 읽는 내내 깊은 공감과 반성, 그리고 회의를 느꼈다. 본질에 대한 탐구는 결여된 채 인간은 도구화 되고, 진짜와 가짜가 혼재된 세계를 들여다 본다. 다소 평범할 수 있눈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꽤나 비범한 불편감을 남긴다. 이 불편감과 문제의식은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작가의 휴머니즘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김곤을 만들고 싶지 않기에, 작가에 대해 확정하지는 않겠다. 라고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영화감독 김곤의 팬클럽의 신규회원이다. 팬클럽의 회원들은 스스로를 단순한 팬이 아니라 힙스터(?) 혹은 마니아, 덕후 같은 '나는 달라' 라고 하는 우월감으로 결집한 사람들로 보인다. 김곤의 작품을 믿는다는 것은 표면상 대상을 향한 공동의 목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취향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자아에 대한 자존이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 그 순환이 시작되면 확신은 점점 더 반박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외부의 반증은 오히려 클럽의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문제는 그 확신이 강해질수록, 애초의 목적이 희미해진다는 데 있다. 클럽의 활동이 축적될수록 클럽의 본래 명분은 점점 소멸한다. 목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맹목성만 남는다. 김곤의 성범죄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클럽의 논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보다 자기 확신의 보존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김곤을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감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해체하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주인공은 불편함을 느끼지만 회피한다. 대신 길티 플레저로 합리화 한다. 불편함을 인식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이 각성된 사람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전용된다는 점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성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괜찮다는 자기기만. 알면서도 소비하는 이 구조는 자기기만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하게 강화한다. 인지부조화는 끝내 해소되지 않은다. 마치 남편의 스마트폰 속에 더럽지만 계속 보게되는 쇼츠처럼.
그리고 클럽의 유대는 어떤가. 그들은 분명 공동체처럼 보인다. 공통의 취향, 공통의 언어, 공통의 적을 가진 집단. 하지만 이 유대의 실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연대라기보다 상호 존재확인에 가깝다. 각자는 서로를 통해 자신의 확신을 반사받는다. 진정한 연대라면 불편한 질문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 유대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한 질문이 도래하는 순간 균열한다. 김곤의 사과 이후 주인공이 느끼는 공허함은 실망이 아니라, 그것이 유대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자기 확신을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게된 회의감이다.
이 후 여행중에 우연히 찾은 호랑이 체험장. 약을 맞혀 축 늘어진 호랑이 옆에서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는다. 여러모로 불편함을 알면서도, 셔터를 누른다. 이 장면은 김곤, 아역배우, 팬클럽 모두가 오버랩 된다. 우리는 '길티(guilty)'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정확히는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기 위한 방어논리를 끊임없이 만든다.
소설이 불편하게 읽히는 이유는 이것이 특정 팬덤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맹목적성, 인지부조화와 회피, 그리고 가짜 연대 속에서 서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수단화되는 방식.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어떤 대상과 사람들을 소비할 때 반복하는 위험한 구조인 것 같다. 팬덤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 소설이 묻는 것은 당신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정말 대상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그 믿음을 통해 강화되는 지독한 자신의 신앙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