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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책으로 여름나기

책과 여름

* 2017년 여름



  덥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렇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위를 덜 타는 편이었는데 올해는 다르다. 한낮의 거리를 걷다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뜨거운 타올로 입과 코를 틀어 막히는 듯한 구체적 위협이 느껴졌다. 에어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 있는 게 상책이다. 여름에 한숨 돌릴 수 있는 건 휴가가 있다는 점. 소위 성수기, 극성수기와 상관 없이 조용할 때 휴가를 쓰는 이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이 7월 말–8월 초 휴가에 돌입한다. 바다나 계곡으로, 영화관이나 쇼핑몰로, 미술관이나 다양한 전시관으로.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갈 곳도 놀 것도 할 것도 많겠으나 ‘여름’ 하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서 아닐까.     


  굳이 휴가가 아니더라도 쉬는 날 맛있는 과일과 간식, 맥주 정도만 갖춰 놓고 책으로 뒹굴거리는 시간은 얼마나 근사한가. 이럴 때의 책은 읽는 용도 이상으로 확장성을 가진다. 우선은 읽는다. 당연히 책은 읽으라고 있는 거지. 재미있다. 빠져든다. 이 쯤 읽었으니 잠깐 SNS를 방문한다. 간식을 먹는다. 맥주를 마신다. 누워서 배 위에 읽던 책 올려놓고 타임라인을 보면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 책 안 보고 핸드폰이나 보고 있는 한심스러운 기분이 상쇄된다. 배 위엔 책이 있고 다시 책을 읽을 거니까. 다만 다시 책으로 돌아오지 않고 잠이 들어버리면 ‘왜 사나…’ 싶은 자책을 돌려 받아야 하는 부작용이 있다. 책-핸드폰-책으로 돌아오지 않고, 책-핸드폰-잠으로 빠졌는데 하루 해가 져버릴 때의 일 말이다. 그런데 여름엔 그게 용서된다(고 합리화한다). 더우니까. 내가 어디 멀리 휴가를 간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뭐. 그래. 인생은 자기 합리화의 연속 아니면 뭐겠어(라고 자기 합리화). 평일엔 갖기 힘든 낮잠 시간. 창으로 해가 45도 방향으로 들어오는 방이나 거실에서, 읽다가 스르륵 잠이 들어 손에서 미끌어진 책이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 이런 건 영화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단잠 자고 깨어 몽롱한 상태에서 읽던 부분 이후를 다시 찾아 읽으며 돌아오는 현실 감각을 온몸 구석구석으로 받아들이는 기분이란.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집어드는 책도 사람마다 다양하겠다. 요즘엔 크게 시기를 가리지 않지만 대개는 여름에 공포 영화가 비교적 많이 상영되었다. 나로선 그런 영화에 질색부터 하지만 ‘소오름’을 즐기는 취향들도 많기도 하거니와 호오를 떠나 여름하면 공포영화가 자동 연상되던 시절도 있었다. 책은 어떤가. 여름의 책. 이 또한 공포와 비슷한 맥락으로 금방 몰입할 수 있는 추리 소설이 많이 읽히는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사건의 개요와 디테일 등을 놓치지 않으면서 범인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의 흥미진진함. 잠시 책을 덮고 한숨 돌린 후 다시 사건으로 뛰어들어 끝까지 달리다 보면 막판에 맞닥뜨리게 되는 반전의 묘미. 그 때의 ‘소오름’. 굳이 추리 형식이 아니더라도 여름은 소설이 많이 읽히는 시기이기도 하다(라고 추정). 


  이열치열의 심정으로(!) 책꽂이에서 날 노려보고 있던 러시아나 남미 고전 등을 파고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후루룩 읽히는 두꺼운 소설도 좋고, 짧지만 생각을 깊게 머무르게 하는 단편들도 좋은 작품들이 많다. 최근 서점가를 점령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도 두꺼운 두 권이지만 뚝딱 읽기에 그만이다. 이번 책은 ‘하루키 월드’ 전형적인 모티프들의 결정판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복 재생의 아쉬움은 있고, 대형 출판사와 서점의 지나친 물량 공세에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싶게 하는 점도 있지만 혹여 하루키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를 계기로 하루키를 정주행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들고 다니기에 콤팩트하고 무난한 문고판 소설들도 각 출판사에서 다양하게 나오는데 예쁨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다. 최근 민음사에서 동네 서점에서만 구입 가능한 문고본 특별판이 나왔는데 무려 김승옥의 『무진기행』,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이다. 이 두 책을 모두 가지고 있고 격하게 아끼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쏜살문고’판을 사고 싶게 충동질을 당하고 있다. 물론 구입하게 된다면 예뻐서 집에 전시만 해놓겠지. 으흠.    

 

  산문으로 가볼까. 여름엔 소설도 좋지만 산문 읽기에도 그만이다. 여름에 읽기 좋은 산문으로 “번역이란,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싱싱한 것과의 만남이다.”라는 말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 김화영 번역가의 산문집 『여름의 묘약』을 추천하고 싶다. 김화영 번역가의 기품 있는 문장은 흐트러진 마음의 결을 단정하게 만들어준다. 부드러운 힘이다. 특히나 여름의 묘약은 제목 자체도 그렇거니와 편한 자세로 하루 한 꼭지씩 아껴 읽다보면 어느 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의 입구에 도착하게 해준다. 부작용이라고 할 만한 것을 꼽자면 엑상 프로방스 행 티켓을 당장 끊고 싶어서 손가락이 간질거리게 된다는 것, 너무 좋아서 한 권을 뚝딱 읽어버리게 될 수도 있는데 좀비가 되어 김화영의 다른 산문이나 번역작을 찾아보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쯤이야 뭐. 소설가 한창훈의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도 좋겠다. 일단 제목에 눈길이 가고 책을 펼치면 행간에서 싱싱한 비린내도 맡을 수가 있는데 읽다 보면 못 먹는 회와 소주까지 소환하고 싶어진다. 이 외에도 다양한 여행 산문들이 여름에 많이 읽히는데 어떤 책을 읽고들 계시는지 문득 궁금하다.   

  

  시라고 빠질 수 있겠나. 긴 문장 읽기도 귀찮으면 시집 한 권으로 여름을 나는 것도 좋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가 짧은 것과 생각의 정도나 길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시 한 편이 주는 다양한 감정의 진폭은 세계를 확장시켜주고 나와 내가 속한 시간을 견디게 해 준다. 1978년 황동규 시집을 시작으로 최근 499번 심보선 시인의 세 번째 시집까지 40년을 달려온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최근 500호 기념 시집을 발간했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오생근 조연정 엮음). 문지에서 발표된 다양한 시들이 풍성하게 엮여 있으니 이 한 권으로 나를 울렁이게 하는 시와 시인을 발견하고, 그 시집을 다시 찾아 읽게 되는 루트가 생성될 지 누가 알겠나. 이 외에도 400번 대를 넘기면서 표지에 먼저 매혹되는 창비시선의 시집들을 찾아봐도 좋겠고, 100번을 목전에 두고 있는 문학동네 시인선도 좋겠다. 읻다 시인선이나 최측의농간. 7월 말 기준으로 각각 두 권씩의 시집이 나왔는데 이 작은 두 출판사의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는 외국 시인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으므로 일단 소장하고 봐야하며, 후자는 품절 되어 구할 수 없었던 귀한 시집을 재발간 하고 있는 터라 이 또한 마찬가지로 소장하고 보면 좋다.   

  

  여름에 보면 좋을 책들이야 차고 넘칠 것이고, 여름에 읽어 좋은 책이 어느 계절엔들 안 어울리겠나. 봄이면 꽃 피어 좋고, 가을이면 바람 불어 좋고, 겨울엔 따뜻한 곳에 앉아 책 펴들기 좋겠지. 우리에겐 합리화의 기능이 장착되어 있고,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여름에 읽기 가장 좋은 책 일 것이다. 좋은 책과 함께 건강한 여름을 나도록 하자. 여름 끝에서 우리, 그 책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을 지도 몰라.     


2017. 7. 24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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