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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그게 아닌데

한 페이지 소설

* 짧은 소설



  시끄러운 맛이다. 맥주에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간결하고 여백이 많은 음식이라야 한다. 혼자 일당백을 하느라 기운 넘쳐나거나, 플레이팅은 깔끔한데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거라곤 가격에 놀라는 것 말고는 없을 때, 실망에 실망이 이어진다. 그 나머지를 맥주로 채웠을 때 취할 수 있는 완벽하다는 기분은 다분히 주관적이다만. 속이 번잡한데 맛도 시끄럽고 음악까지 정신 없다. 혼자서 뭘 더 바래.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듣는다. 모든 게 뭉개진다. 모던한 공간에 담겨 있으면 생각도 모던하게 정리될 줄 알았나. 착각도 실망도 일관적이구나. 생맥주 한 잔만 마시고 일어선다. 며칠 전 민아 씨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선배만 다 잘났죠?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탈색시켜버린 듯한 눈으로 그 한 마디만 남기고 퇴사한 그녀는 할 말을 고르는 나 대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듯 묻는 김 대리를 보고 피식 웃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증발되어 버렸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메신저도 삭제하여 ‘증발’이라 했지만 이 쪽 바운더리 안에서의 말이지 뭘 증발 씩이나 했겠나. 다들 좋은 뜻으로 한 일인데 본인 조금 억울하다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생각할수록 괘씸한데 어쩐지 그게 다가 아니다. 찜찜한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내가 궁금한 게 민아 씨의 말인지, 일련의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 황당함인지, 그 모든 것들로 인한 찜찜한 마음의 실체인지도 모호해져 버렸다. 이미 해가 져버려 웬만한 술집은 사람이 번잡할테고 혼자 마시기에도 눈치가 보이는 시간이다. 적당한 벤치가 보이면 앉으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산다. 김 대리 니가 더 웃겨. 한 모금만 마신다는 게 벌컥벌컥이 되어 버린다. 아 이게 아닌데. 왜 앉을 만한 벤치는 없는 거야. 평소 흔하던 건 꼭 찾을 때만 없다. 뭔 법칙이야 이건. 결과적으론 민아 씨의 주장이 맞았는데 퇴사는 민아 씨가 하게 되었다. 아 이게 아닌데, 생각했지만 이미 상황은 틀어져 있었고 회사 분위기는 그녀만 사라지면 모든 게 깔끔해 질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건 의도에 포함된 전개가 아니었다. 나와 각별히 친하기도 했고, 이번 일에 대해 제일 처음 고민을 털어 놓은 상대도 나였다. 성실함이나 똑부러지는 업무 능력이야 두 말할 나위 없는 사람이라 민아 씨가 아니라 기획안 ‘빠꾸’ 당해 아직 퇴근도 못하고 있는 저 김 대리가 나갔어야 맞는 건데 어찌어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거지? 힘찬 강물을 거슬러 연어는 잘도 헤엄쳐 올라가드만 난감한 상황은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봐도 바꿀 수가 없다. 아 그나저나 앉을 만한 곳은 왜 없는 거야. 내가 뭘 대단한 걸 바라나? 나한테 왜 이래 정말. 군 제대 이후 단체 생활과는 명확히 선을 긋고 조직에서의 나를 분리시키면서 살았다. 민아 씨는 성향도 비슷했고 남자 여자를 떠나 코드가 잘 맞았다. 선배,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우리 코드의 끝을 알리는 시작이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건 민아 씨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어느 순간부터 꼬여 있던 줄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정의감에만 도취돼 있었던 거야, 회의 한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였다. 맥주는 다 마셔가는 데 걸어도 걸어도 앉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선배, 그러니까 김 대리가요…     

2017. 6. 5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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