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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6. 2021

어쩌면 죽었던 걸지도 모르지

리스본행 야간열차 안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난 후, 다음 여행의 1순위는 일찌감치 리스본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도시이다. 이번 여행은 목적지보다 그 과정이 중요했다. 반드시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가기. 바르셀로나로 들어가 며칠 지내고 마드리드로 향했는데 그곳이 바로 나를 리스본에 내려 줄 야간열차가 출발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2월 30일 밤에 출발하여 그 해 마지막 날 리스본의 아침 공기를 마시는 순간을 상상하니 머리 위에서 불꽃이 팡팡 터지는 기분이었다. 황홀했다. 마드리드 기차역에 여유 있게 도착하여 샌드위치에 맥주를 한 잔 두 잔 마시며 탑승 시간을 기다렸고, 드디어 올라탄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층 침대가 양쪽으로 놓인 객실로 몸을 부리고 나니 내가 이곳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말 그대로 꿈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열차가 리스본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공포에서 시작하여 묘하고 슬픈 기분으로 다채롭게 변하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들과 한 객실을 쓰게 될까, 이상한 사람은 아니어야 할텐데… 하는 바람이 무색하게도 세 개의 침대는 빈 채 나 혼자만 한 공간을 쓰게 됐다. 출발 시각이 임박하여 승무원이 점검을 다니는데 패스포트를 달란다. Why?? 하고 물었으나, 우노 도스 트레스 콰트로(스페인 숫자 단위 1, 2, 3, 4)와 올라! 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설명해 준들 뭘 알았겠나. 어찌어찌 하다가 여권을 건네주게 되었고, 그때부터 근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 사람 사기꾼 아닌가. 저 사람이 누군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승무원 복장만 보고 덜컥 넘긴 내가 한심스러웠다. 옆에 누가 있다면 상의라도 했겠는데 객실엔 나 혼자 덜렁. ‘괜찮겠지’와 ‘어떡하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는 사이 열차는 출발했다. 처음의 걱정은 피곤에 차츰 무뎌져 일단 구석에 밀어두게 되었다. 책을 펼쳤으나 책이고 뭐고 피곤에 지쳐 잠이 쏟아졌다. 객실의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다가,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떴다 눈을 깜빡여 보았다. 감은 상태나 뜬 상태나 같았다. 암흑이었다. 더하고 뺄 것도 없이 글자 그대로의 암흑이었다. 열차가 인적 없는 밤을 달려가는지 가로등 불빛 하나 없었다. 불을 켤까 하다가 이상한 기분에 그 상태로 눈 감고 가만히 누워 있어 보았다.     


   저승 가는 기분이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지런히 누워 있고, 여권은 없고, 안팎은 캄캄하고, 철커덩철커덩 열차는 달려가고 있는데, 아무도 없이 혼자 그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게 아무래도 현실 같지가 않았다. 울컥, 눈물이 났다. 나 혼자 내 장례를 치르고 관에 누워 저승으로 가는 기분.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실제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때의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환상 속에 놓여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다음 날 아침, 객실 문을 두드리며 도착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던 승무원이 여권을 다시 돌려주었고, 도착지는 저승이 아니라 그렇게도 바라던 리스본이었다. 야간 열차에서는 여권을 거둬가서 다음 날 돌려주는 걸 몰랐기 때문에 느꼈던 공포라 그건 그냥 웃고 나면 그만이지만, 캄캄한 철로 위를 달리던 선명한 기차 소리, 죽어서 관에 누우면 이런 식으로 저승 가는 건 아닐까, 아니, 나는 지금 살아있는 걸까, 죽은 상태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깊이 침잠하던 그 날의 강렬한 감정은 내내 잊히지가 않는다. 아마도 오랜 시간 그렇겠지.    

 

2017. 10. 23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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