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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6. 2021

관객이 없어도 우리는

책으로 보는 연극적인 순간들

  “나무는 ‘ㅋㅋㅋ’ 하고 웃지 않는다”. 현수막의 문구는 대학 시절 양희가 쓰고 있던 연극의 제목이었다.(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사랑한다 말하였으나 그 이상으로 뭘 더 하려 하지 않아 자신을 채근하게 만들고 조바심나게 했던 대학 시절의 그 양희. 직장인들을 위해 점심 시간을 이용한 40분 미니극으로 진행되는 공연의 내용은 눈만 빼고 모두 검은 쫄쫄이복을 입은 배우가 객석의 관객 한 명을 무대로 이끌어 와 자신의 맞은 편에 앉히고선 아무 말도,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마주보고 앉아만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일명 관객 참여형 부조리극. 작가 김금희에 따르면 작중 양희의 연극은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에서 착안됐다. 필용이 기억하는 양희 연극의 제목은 “나무는 ‘크크크’ 하고 웃지 않는다”였고, 대본 분량도 대학 노트 세 권에 달하는 것이었다. ‘크크크’가  ‘ㅋㅋㅋ’로 바뀌고, 대학 노트 세 권이 침묵으로 수렴하기까지 양희가 어떤 풍화를 겪었던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필용은 닫혀 있는 공연장 문을 보며 오늘은 누가 무대에 올라가 그 시간을 견디고 있을까 생각했‘지만 글쎄,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이 비단 무대 위의 퍼포머들 뿐일까?     


  한 편의 연극처럼 여겨지는, 작중 인물들 입장에선 겪고 있는 일이 차라리 연극이었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여덟 살이 되는 스코티의 생일을 준비하며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해놓은 앤은(레이먼드 카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대성당』) 당일 아침, 파티 대신 차에 치인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고 며칠 내내 혼수 상태이던 아이는 결국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빵집 주인은 주문한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손님에게 지속적으로 전화를 했는데, 경황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지만 아이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앤의 분노는 빵집 주인에게로 향하게 된다. 사정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로 상처를 주게 된 미안함에 충격을 받지만 이내 추스르곤 큰 슬픔에 사로 잡혀 있는 부부를 위해 앞치마를 푼다. “여기 앉으시오. 내가 지금 의자를 가져 오겠소.” 그러더니 작은 철제의자 두 개를 가져온다. 이제 세 인물이 탁자 하나를 두고 바투 앉아 핀 조명만 비추고 있는 무대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빵집 주인과 앤 부부의 대화를 객석에서 집중하듯 보도록 하자.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부부는 그가 가져 온 따뜻한 계피롤빵을 먹기 시작한다.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은 다 여기에 있으니.” 아이를 잃은 일이 차라리 한 편의 연극이길 바라겠지만, 그리하여 이 대화가 연극 대사라면 좋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감당하며 다만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 뿐. 살면서 어떤 일들은 한 편의 연극이길 바란다. 이것은 실제가 아닐 거라고,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삶과 꿈과 연극. 어쩌면 같은 뜻의 다른 명명인 건 아닐까?     


  장편소설로 분류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는 생을 아우르는 한 편의 기나긴 시이기도 인생의 어떤 시기들을 챕터 별로 나눈 희곡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결 같다. 소설의 시작부터가 연극처럼 보인다. 파도에 실려 언어가 물결치듯 다가왔다 멀어지는 느낌이 시종 반복되는데 그 때문에 어떤 면에선 몽환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는 정확히 앞을 똑바로 보면서 삶의 명철한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버나드, 수잔, 로우다, 네빌, 지니, 루이스이지만 그들은 개별 존재이기도 하고 한 인격체의 다른 자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도』는 내용과 구성 면에서 연극처럼 여겨지는데 반해 화려한 삶의 주인공 개츠비에게는 삶 자체가 그야말로 한 편의 연극 같다.  

    

  1920년대 재즈 시대의 젊은 부자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하는 여자 데이지를 위해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초호화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화려한 쇼를 펼쳐 보이지만 그 저택의 강렬한 조명 아래에서 정작 개츠비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추종하는 건 개츠비가 아니라 그가 거느리고 있는 황금이다. 제 연극의 무대를 마련하여 파티를 열고 또 열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정작 자신에겐 데이지라는 관객 단 한 명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텅 빈 죽음을 맞이했을 땐 비로소 주인공이 되었을까. 속물들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믿었던 인물의 비극적 죽음. 쇼는 끝나고 막은 내려가고 사람들은 떠났다.      


  개츠비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빨강머리 앤이 있다. “저요, 오늘 아침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 않아요. 아침부터 그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어야 되겠어요? 아침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어릴 적 본 캐릭터 중에 앤만큼 긍정적인 아이는 없었다. 앤의 말과 행동은 때로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낙관하며 하루하루를 환희의 무대로 만들고 싶어 했던 아이에겐 그 또한 강한 생존 본능의 발현이 아니었겠나. 앤처럼 매일을 하나의 무대처럼 살 순 없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든 극적인 순간은 필요하다. 또한 그것은 대부분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 온다. 자신을 둘러 싼 모든 배경을 화려하게 갖춰 놓고 정작 자신은 빠져 있는 개츠비가 아니라 슬픔에 휩싸여 주저 앉은 이에게 따뜻한 롤빵과 차 한 잔을 내어 주는 순간, 일렁이는 파도에 실려 체념과 의지 사이에서 흔들리더라도 앞을 응시하는 나날, 제 그림자 같은 존재를 마주보고 앉아 끝까지 그 무대를 견디려 애쓰는 사람에게 ‘극적으로’ 마련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내가 제일 듣고 싶은 ‘대사’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님을 초대하는 앤에게 마릴라가 했던 말이다. “버찌 설탕 조림이 들어 있는 단지는 열어도 된다. 과일이 든 케이크하고 쿠키를 먹으렴.”      


2019. 4월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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