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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6. 2021

모르는 세계의 빛이 흘러나오는
여행자의 트렁크

여행지에서 산 책

  볼수록 근사하다. 가을볕은 어디서 그렇게 선명하고 영근 색깔을 빚어낼까.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빛깔들이 투명한 소리가 날 정도로 쨍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날들. 빛의 한가운데 있다 보면 다른 세상에 속한 기분의 되어 이쪽의 고민이야 아무려면 어떤가의 심정이 된다. 여행자의 마음이 꼭 이와 같아서 이 도시 저 공간을 돌아다닐 때면 현실 감각이 흐릿해지고 꿈속인 듯 여겨진다. 두고 온 일상, 먹고 살 고민 따위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방목의 상태.     


  2년 전, 딴에는 좀 길게 먼 곳을 다녀왔다. 몇 년이든 몇 달이든 배낭 메고 다니는 여행자들도 많지만 생업과 관련한 일을 중단해 보기로 결심했던 당시의 내게 한 달여의 시간은 큰 마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내 여행은 주로 책이나 영화 속의 공간을 찾아다니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거나 미술품을 감상하는 등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당시 터키에선 주로 오르한 파묵과 관련한 장소나 성당, 모스크 등의 건축 양식을, 그리스에선 그리스 철학자들과 예술품, 유적들을 보러 다니느라 촘촘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 섬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배나 비행기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 가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바로 서점과 헌책방인데 아테네 시내, 고개만 들면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는 어느 헌책방에서 그리스어로 된 헌책 두 권을 샀다.(그 책을 사고 삼십 분도 안 되어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한 기억은 꾹꾹 눌러두기로 하자.) 물론 한 글자도 읽을 줄 아는 게 없지만 그 나라 글자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즐겁다. 아주 오래전 이곳의 글자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생겨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보다 몇 년 전 파리에선 파리 사람들도 잘 모르는 조르주 페렉 거리를 찾아가 혼자 그 몇 발짝 안되는 골목을 이리 걷고 저리 걸으며 미친 사람처럼 부풀었었고, 사무엘 베케트와 사르트르&보부아르, 수전 손택의 무덤이 있는 몽파르나스에선 여기 없는 작가들의 흔적과 함께 한나절 내내 거닐기도 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헌책 노점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프랑스어판을 구입했는데 원하는 책을 그런 곳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다.      


  페르난두 페소아에 흠뻑 빠져 있던 해의 12월 마지막 두 주는 리스본을 가기 위한 여정으로 꾸려졌다. 『리스본행 야간열차』(파스칼 메르시어, 들녘)의 여운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드리드 어느 골목의 작은 책방에서 명화 패러디 그림책 한 권을 사고선 드디어 타게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로도 유명한데 마침 연말연시라 작가의 박물관은 문이 닫힌 상태였다. 대신 도시는 온통 페소아로 넘실거렸는데 이미 가져간 책 무게도 많아 그곳에선 페소아 책갈피 같은 것만 잔뜩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다녀오기가 비교적 수월하여 일본은 자주 드나드는 편인데 때문에 한 권 두 권 사 모은 일본어 책이 제법 있다. 물론 처음 사 올 땐 그나마 조금 읽고 쓸 줄 안다고 좋아하는 일본 작가 책을 원문으로 보리라는 야무진 계획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나라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기념품처럼 책장 한 쪽에 모아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산 책이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은 표지별로 몇 권,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여러 권, 키키 키린이나 오즈 야스지로 등 영화(감독, 배우) 관련 책, 동물 관련 책, 또 이런저런 책 책 책들.  

   

  이 계절의 반짝임이 낙엽과 함께 사라지고 나면 기나긴 겨울을 지나야 한다. 추위 취약자인 나로선 실내형 인간 모드로 돌입해야 하는 계절.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걸 워낙에 좋아하지만 실내 여행에도 일가견이 있다. 쌓아 둔 책더미와 맛있는 간식, 커피와 맥주만 있다면 하루도 짧다. 

         

2019. 10월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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