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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Aug 31. 2021

그림, 생동하는 침묵의 공간

펄떡이는 에곤 실레와 침잠하는 마크 로스코와,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를 좋아한다. 한 번 마음을 마음을 빼앗기면 여간해선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그의 그림은 강렬하다. 탐미주의에 홀린 적이 있었다. 예술에 미쳐 제정신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어가던 시절이었다. 청춘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 갈 실존에 관한 천착과도 맞물려 그런 이야기들에 피가 뜨거워지던 시간들이었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구로이 센지 지음, 다빈치)이라는 책을 읽은 게 2007년. 아직도 이 책을 펼치면 무언가 펄떡거리며 뛰쳐 나올 것 같다. 그의 유명한 그림들은 밀어두고, 노이렝바흐 교도소에 갇혔을 당시 썼던 옥중일기를 한 대목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912년 4월 16일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내 고통을 덜어 줄 물건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종이, 연필,     붓, 물감을 드디어 얻게 되었다. 

      나는 다시 그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림이 없었다면 참아내기 힘든 상황도 이젠 견딜 수가 있을     것이다. 오오, 예술이여! 너를 위해서라면 이 몸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가 교도소에서 그린 그림들의 제목들: <한 개의 오렌지가 유일한 빛이었다>, <나는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정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의자와 물주전자의 유기적인 움직임>, <현대 예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원초적으로 불변하는 것이다>, <손수건 두 장>, <예술가가 활동을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이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나는 안티테제를 사랑한다>, <죄수!> 등. 제목 자체가 모두 시에 다름 아니다. 4월 25일, 감옥에서 그린 마지막 자화상의 제목은 <나는 나의 예술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후까지 기꺼이 견뎌낼 것이다!>인데 내게 전혜린을 연상케 했던 그날의 일기는 이러하다.

 

      어제, 흐느껴 울다, 소리 죽여, 벌벌 떨며, 목메어 울다. 절규. 고함치는 듯한, 절박한, 애원으로 가득한,     신음하는 듯한. 목에 메도록 흐느껴 울다. 절망적인, 끔찍하게 절망적인. 그리고 마침내 얼어붙은 손발을     무감각하게 뻗고, 극렬한 공표에 사로잡힌 채로 몸을 떨면서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     히 나는 나의 예술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후까지 기꺼이 견뎌낼 것이다. 


  작년(글 쓸 당시는 2015년), 빈의 ‘레오폴트 뮤지엄’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었다. 사실 빈은 실레 때문에 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 하나하나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가 놀랍도록 생생하게 다가왔다. 벨베데레 궁에서 클림트의 <키스>도 보았지만 실레의 그림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展’ 관람 후 인상 깊었던 작품 몇 점을 엽서로 구입해왔다. 그 중 하나를 의미 있는 친구에게 선물했더니 “왜 엽서에 김을 붙여 온거야!”라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듣고 보니 과연. 말은 그렇게 해도 냉장고에 붙여 놓고 오며가며 그 김(!)을 잘 감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복잡한 과정을 지나 구현된 단 하나의 선, 단 하나의 면, 단 하나의 색깔... 그건 '고작 하나'가 아니다. 먼 곳을 찾아 헤맨 눈이라야 눈 앞의 단순함을 발견할 수 있다. 


2015. 5. 31 



* 써두었던 글을 아카이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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