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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안녕,

한 페이지 소설

* 짧은 분량의 소설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는다. 커피를 한 모금 크게 마신다. 눈을 감으면 눈을 감은 내가 있다. 암전. 누군가 말을 걸어 오고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초콜릿 때문에 입을 열 수 없다,는 시늉을 한다.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은 안다. 여기 있고, 거기 있는데,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은 아는 것 같다. 이유는 알지만 아는 이유는 아는 이유가 아니다. 모르는 이유가 더 많을 것이고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안다. 힘겹게 놓친 손을 다시 놓치고 있다. 의도를 생각하면 없던 의도가 생겨나고, 생겨난 의도가 오해를 이해한다. 비틀비틀. 걷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너를 잘 알던 나는 너를 잘 모르는 사람이 되고 있다. 몇 번이고 허물어지며 너는 그렇게 말했지.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땐 꼭 나랑 살자. 아니.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 생이 있는지 없는 지 어떻게 알아. 나중에... 나아중에, 할아버지 되고 할머니 되고 그 때까지도 이 마음 변하지 않으면, 그 때 같이 살자. 같이 죽자.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물 속에 잠긴 나를 가끔 건져 내어 마주 한다. 퉁퉁 불어 있는 내가 겨우 눈을 떴다, 감는다. 죽지는 않았어. 온통 없는 너는 온통 있는 너. 허공에 부유하는 많은 말들. 하지 않은, 듣지 못한 말들로 침묵이 소란스럽다. 가닿지 못하고 구부러진 말들이 바닥에 흥건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우물로 흘러 들었네. 삼투압. 나에게 닿지 못하고 휘어진 말들이 너를 찌르고, 너에게 보내지 못하고 휘어진 말들이 나를 찌르고. 콕콕. 쿡쿡. 삼투압. 그거 알아? 존 버거가 죽었어. ‘사랑은 존재의 중심을 재건한다.’ 우리 함께 좋아했던 문장. 내 사랑. 하비비. 미 구아포. 미 소플레테. 일본어판 『A가 X에게』를 사고 싶어 물어보았다. 존 바가. 존 바가. 프럼 에이 투 에크스. 존 바가. 서점 직원이 하이하이 하지만 갸우뚱한다. 자신 없어 하는 표정으로 검색하는데 인기 순으로 햄버거 맛집이 주욱 나열된다. 이이에이에. 다른 직원이 동원되고 일이 커진다. 이 쯤에서 괜찮다 하고 싶은데 서점 직원은 최선을 다해 검색 한다. 존 바가. 존 바가. 드디어 찾아 낸 존 버거. 아아, 존 바자? 아, 존 바자! 그 잠깐의 소동으로 알아낸 건 존 버거의 일본식 발음은 존 바자. 찾는 책은 일본어로 발간되지도 않았다는 것. 모르는 말들 속에서 우리가 좋아했던 대목을 찾아내어 손으로 만져 보고 싶었다. 그 뿐. 이상하지. 너와 내가, 어딘가에서, 밤과 낮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곳에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더 진짜 같거든. 그래서 눈을 뜰 수가 없어, 한사코. 없는 현실이 단단한 오늘을 지탱하고 입에는 초콜릿. 녹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1, 2, 3. 눈을 뜬다. 1, 2, 3. 눈을 감으면 네가 있고, 눈을 뜨면 내가 있다. 없는 내(네)가 있다. 우물 속엔 빛이 들지 않고, 아늑해. 구멍의 반대 편으로 침잠하면 더 넓은 곳으로 헤엄칠 수 있지. 안녕? 보골보골. 안녕, 꼬록꼬록.     

2017. 1. 30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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