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이야기
아이를 낳고 아이들에게 잔디밭 있는 집을 제공해 주겠다는 일념 하에 맨하탄에서 1시간 정도의 롱 아일랜드라는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그 덕에 맨하탄으로 출퇴근을 하던 아내는 왕복 3시간의 출퇴근 길을 매일 견뎌야 했지만 그래도 좀 더 넓은 집,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뒤뜰에서 노는 아이를 보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롱아일렌드 중에서도 나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다. 특별히 한국인 밀집 지역을 피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동네는 최고의 학군에 위치해 있고 엄마들의 엄청난 치맛바람을 동반한다. (아마도 한국인의 피에는 교육열이라는 특별한 성분이 추가되어있는 듯하다.) 그 전쟁터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도 그럴 능력도 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철저하게 집에서는 한국말을 시킨다. 영어야 어차피 학교 가면 배울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아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치원에 처음 갈 때 아이는 영어를 한마디도 알아듯지 못했다. 어린아이니까 영어야 금방 배우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유치원 다닌지 두어 달 만에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할 정도까지 영어가 늘었다. 교육적으로야 성공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에 대해서 너무 과소평가 한 경향이 있었다. 처음으로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간 유치원에서 혼자만 동양인이고 게다가 혼자서만 말이 안 통했을 텐데 그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은 아마 4살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가혹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내에게서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유치원을 다니던 큰딸 유진이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하길 '엄마 유진이 머리가 까매서 친구들이 나랑 안 놀겠데'라고 했단다.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겪을 일 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겪게 되었다. 나도 겪었고 아내도 겪었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차별은 이민자인 우리가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일부다. 게다가 같이 의지할 동양인 친구가 없다면 그 충격은 훨씬 더 크다. 아이들은 순수해서 보이는 데로 다 말해버린다. 아마도 짓궂은 꼬마 아이의 말에 유진이가 상처를 받은 듯했다.
집에 와서 유진이랑 이야기를 했다. 걱정과는 달리 아직 어린아이여서 속상한 마음은 금세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유진이가 '아빠 유진이는 노란 머리가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 아마도 머릿속에 자신도 모르게 금발에 대한 동경이 생긴 듯했다. 유진이를 무릎에 앉히고 유진이의 까만 머리가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지 말해 줬다. 친구들의 피부 색깔.. 머리 색깔.. 다들 그 나름대로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해줬다. 아마 친구가 잘 모르고 유진이를 놀려준 것이니 나중에 또 그러거든 유진이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라고 말해줬다. 정확하게 다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본인의 까만 머리가 부끄럽지 않다는 사실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따로 유치원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좀 신경 써서 지켜봐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굉장희 큰 이슈이기 때문에 유치원 선생님한테서도 신경 써서 지켜보고 지도하겠다는 답장이 바로 왔다.
소수인종으로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남들보다 생각할 것도 많다. 점심 도시락을 쌀 데도 혹시나 음식이 다르다고 아이들이 놀리지는 않을까 두 번 생각하게 되고, 옷을 입혀도 동양 아이라고 우습게 보지 않을까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가장 신경을 쓰는 건 동양인인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느끼게 자존감을 심어주는 일이다. 놀림이야 막을 수 없다. 아마 살아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언제까지 바람막이를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서 흔들림 없이 서있을 수 있는 아이를 만들어야 한다.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새삼 또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