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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Sangwoo Kim Oct 06. 2015

(1) 엄마와 헤어지다.   

파란만장 뉴욕이민 이야기(1)

난 그냥 평범한 중3 학생이었다. 집이 잘 살지도, 공부를 잘하지도, 뭐하나 특출 나지 않은 그런 학생이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는다면 아빠는 멀리 미국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 정도. 내가 아주 어릴 적 아빠는 미국으로 떠낫고 엄마는 항상 아빠가 돈 찍는 기계를 발명하러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고, 아빠가 돌아오시면 장난감을 엄청 많이 살수 있다고 나에게 늘 말씀하셨다. 요즘 영특한 초등학생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지만 난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5학년 때까지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다. 어느 날 엄마 서랍에서 발견한 이혼 서류를 보고 충격을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걸 몰래 집 뒷골목으로 가지고 가서 버렸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는다. 그 후 나에게 아빠는 미움, 분노, 두려움.. 그런 존재였다.


아빠가 없는 나에겐 엄마 뿐이었다. 어릴때부터 항상 엄마는 아프셨다. 병원, 약, 한약은 엄마에 대한 기억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늘 어린 나에게 허리가 아프시다며 허리를 주무르라고 하셨고 10분에 100원을 주셨다. 어린 나에게 그 10분이 얼마나 길던지.. 처음 3분 이후에는 대충 대충 흉내만 내는 악덕 마사지 사였다. 난 그렇게 엄마의 병과 함께 자랐고 그것에 대해 무뎌졌다. 아니 무심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엄마는 나를 앞에 앉혀놓으시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대장암. 엄마가 대장암에 걸렸다고 했다. 이제 항암치료가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나기는 했지만 큰 충격은 받지 않았던걸로 기억된다. 엄마의 병에는 이골이 난점도 있었고 이 병이 엄마를 나에게서 뺏어갈수 있을것이라고 상상하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엄마는 항암치료만 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나를 안심시켰고 난 또 그 거짓말을 굳게 믿었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날은 너무나도  힘들어하셨고 엄마의 몸도 점점 더 약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항암치료는 엄마가 하루종일 안들어왔다가 밤에 들어와서 아파하는 날 정도였고 늘 그랬듯이 무심하게 지나 보냈다.


어쩌면 엄마가 죽을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든것은 엄마가 입원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였다. 엄마와  단 둘이 살던 나는 엄마가 입원하시게 되자 병원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다.  여섯명의 암환자가 누워있는 병실은 항상 무거운 분위기였고 100원짜리를 넣어야 나오던 TV 를 아무리 봐도 시간은 멈춘듯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병원 간의침대, 주사바늘에 찔려서 멍이 가득하던 엄마 팔, 엄마 피가 묻어있던 병원 침대 시트,  난 병원이 끔찍하게 싫었다. (지금도 큰 병원에 가면 그때의 기억때문인지 숨이 턱턱 막힌다.) 병원을 탈출해 집에 돌아와 혼자 며칠 간 지내기도 했었는데 엄마가 없는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밥을 하려고 쌀을 씻는데 그 안에서 쌀벌레가 가득 나왔다. 라면 속에도 알 수 없는 벌레의 번데기가 들어있었으나 대충 털어내고 먹었다. 프라이팬에 계란 프라이를 하는데 자꾸 타기만 했다. 난 그날 처음으로 계란 프라이를 하려면 식용유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도 집이 좋았다. 점점 말라가는 엄마, 병원에서 나는 알코올 냄새.. 생각만 해도 싫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병원생활은 일 년을 넘어갔다. 내 생애 그때가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시고 나서 나에게 종종 미국에 가서 살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다. 아빠랑 미국에 가서 살라고.. 아빠에 대한 미움만 가득하던 나는 울면서 싫다고 엄마에게 매달리곤 했었다. 엄마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런저런 말로 나를 설득했고 엄마와의 이별이 다가옴을 느꼈던 나는 어느 날 아빠와 같이 살수도 있을것 같다고 말했다. 나중에 이모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가겠다고 말 하고 나서 엄마가 많이 서운해하셨단다. 보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또 다른 마음으로는 엄마를 잡아주길 바랬던 것 같다. 엄마도 나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다는 걸 엄마가 돌아가신 나이에 가까워져서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항상 강한 엄마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도 혼자 남겨지는게 두려운 그져 보통 사람 이었다. 나에게 늘 강한 모습만을 보여줘야 했던 엄마 생각을 하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직 어린 아들을 멀리 보내야만 했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이제와 생각해보니 가슴이 저릿해 온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추석을 이틀 남긴 날 밤이었다. 병원 복도 소파에서 잠을자던 나를 작은 외삼촌이 흔들었다.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자 엄마는 힘들게 숨을 쉬고 계셨다. 몇분의 긴장감.. 큰숨을 몇번 들이 마시시고는 깡마른 엄마의 몸은 더이상 버틸힘이 없다는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통제에 취해서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할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아 이제야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병원 장례식장에 같은반 친구들이 왔을때는 반갑기 까지 했다. 슬프지 않았다. 문득 내가 미쳤나?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엄마의 장례식때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왜 슬프지 않을까에대한 의아함, 슬프지 않은것에 대한 미안함 이 주를 이뤘다.


 장례식을 다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조용했다. 늘 혼자 지내는 집이였는데.. 그날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와 계셨음에도 더 조용했다. 엄마방을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너무 미워졌다. 우리 엄마방인데 왜 저사람들이 있는지 너무 화가 났다. 갑자기 끝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슬프지는 않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는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베게에 대고 그렇게 몇시간을 울었다. 그렇게 얼마를 울고 조금 진정되었다가 또 아무이유 없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난 이제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제 완벽한 내 편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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