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뉴욕이민 이야기(2)
아빠의 마지막 기억은 김포공항에서 였다. 머리가 나빠서인지 나는 초등학교 이전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빠의 마지막 기억은 유일하게 기억이 난다. 아빠는 미국으로 돈 찍는 기계를 발명하러 간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꼬맹이 아들에게 아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했지만 실패를 했던 모양이다. 공항에서 나는 아빠에게 매달려 있었고 절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아빠는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어디론가 올라간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장면은 트라우마가 되어 가끔 악몸에서 재연되고는 했다. 그 이후에 나에 유년시절에 아빠의 기억은 없었다.
엄마에게는 남자가 있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말했다. "너희 아빠는 능력이 없다. 미국에서 돈을 하나도 보내주지 않는다. 우리가 먹고사는 건 아저씨가 돈을 주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쯤 엄마를 만나러 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멍청하게도 엄마에게 남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엄마 아빠가 이혼했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냥 나는 아저씨가 올 때마다 사오는 과자봉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 아빠는 가족을 내팽게친 능력 없고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엄마가 아빠를 따라서 미국으로 가란다. 이유는 더 기가 막히다. 곧 엄마가 곧 죽을지도 모른단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죽기보다 더 싫었다. 아빠도 싫은데 미국이라니!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아빠를 따라 가라니... 중학교 2학년 꼬맹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세상이 너무 미웠다. 엄마도 미웠고 아빠는 더 미웠다. 그때 나에 단 하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안 아프게 죽을 수 있을까였다. 결국 겁이 많아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더 이상 없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갔다. 게다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학생 나부랭이다. 우리 집에는 가끔 엄마 몰래 나를 만나고 가시던 친할머니 할아버지가 이사를 왔다. 아빠도 잠깐 미국에서 돌아왔다. 어떤 아줌마와 함께였다. 다들 꼴 보기 싫었다. 여기는 나랑 엄마랑 사는 집인데 난데없는 침입자들이 모두 다 망쳐놓은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다 아빠 때문이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트린건, 엄마를 속상하게 해서 죽게 한 건 모두 다 아빠 책임이었다. 아빠가 돈만 많이 벌어다 줬으면 엄마는 살아있었을 꺼다. 다 아빠가 망처 놓았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아빠를 향한 미움과 분노로 변해버렸다.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가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엄마와 살던 내가 아빠와 살아야 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대기 전까지는 쓸모없는 동양 남자애를 그들의 땅에 들여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깟 미국 누가 가고 싶다고 했나.. 우리 엄마는 죽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없이 가는 거다. 나도 그깟 미국 가고 싶지 않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엄마는 죽었고 꼴도 보기 싫은 아빠를 따라가지 않으면 고아가 될 것이라는 비참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일 년 넘게 수많은 서류들을 준비했고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서 겨우 영주권이 허가가 되었다.
이제 정말 간다. 미국으로..
그것도 한국에서 제일 먼 미국 동쪽 끝 뉴욕이라는 곳으로..
너무나 미운 아빠가 있는 그곳으로..
30분 이상만 차를 타도 멀미를 하던 촌놈은 비행기를 18시간이나 타야 하는 미국으로 떠나간다..
아니 쫏겨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