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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Sangwoo Kim Oct 06. 2015

 (2) 아빠와 만나다

파란만장  뉴욕이민 이야기(2)

아빠의 마지막 기억은 김포공항에서 였다. 머리가 나빠서인지 나는 초등학교 이전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빠의 마지막 기억은 유일하게 기억이 난다. 아빠는 미국으로 돈 찍는 기계를 발명하러 간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꼬맹이 아들에게 아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했지만 실패를 했던 모양이다. 공항에서 나는 아빠에게 매달려 있었고 절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아빠는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어디론가 올라간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장면은 트라우마가 되어 가끔 악몸에서 재연되고는 했다. 그 이후에 나에 유년시절에 아빠의 기억은 없었다.


엄마에게는 남자가 있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말했다. "너희 아빠는 능력이 없다. 미국에서 돈을 하나도 보내주지 않는다. 우리가  먹고사는 건 아저씨가 돈을 주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쯤 엄마를 만나러 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멍청하게도 엄마에게 남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엄마 아빠가 이혼했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냥 나는 아저씨가 올 때마다 사오는 과자봉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 아빠는 가족을 내팽게친 능력 없고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엄마가 아빠를 따라서 미국으로 가란다. 이유는 더 기가 막히다. 곧 엄마가 곧 죽을지도 모른단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죽기보다 더 싫었다. 아빠도 싫은데 미국이라니!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아빠를 따라 가라니... 중학교 2학년 꼬맹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세상이 너무 미웠다. 엄마도 미웠고 아빠는 더 미웠다. 그때 나에 단 하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안 아프게 죽을 수 있을까였다. 결국 겁이 많아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더 이상 없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갔다. 게다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학생 나부랭이다. 우리 집에는 가끔 엄마 몰래 나를 만나고 가시던 친할머니 할아버지가 이사를 왔다. 아빠도 잠깐 미국에서 돌아왔다. 어떤 아줌마와 함께였다. 다들  꼴 보기 싫었다. 여기는 나랑 엄마랑 사는 집인데 난데없는 침입자들이 모두 다 망쳐놓은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다 아빠 때문이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트린건, 엄마를 속상하게 해서 죽게 한 건 모두 다 아빠 책임이었다. 아빠가 돈만 많이 벌어다 줬으면 엄마는 살아있었을 꺼다. 다 아빠가 망처 놓았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아빠를 향한 미움과 분노로 변해버렸다.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가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엄마와 살던 내가 아빠와 살아야 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대기 전까지는 쓸모없는 동양 남자애를 그들의 땅에 들여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깟 미국 누가 가고 싶다고 했나.. 우리 엄마는 죽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없이 가는 거다. 나도 그깟 미국 가고 싶지 않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엄마는 죽었고 꼴도 보기 싫은 아빠를 따라가지 않으면 고아가 될 것이라는 비참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일 년 넘게 수많은 서류들을 준비했고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서 겨우 영주권이 허가가 되었다.


이제 정말 간다. 미국으로..

그것도 한국에서 제일 먼 미국 동쪽 끝 뉴욕이라는 곳으로..

너무나 미운 아빠가 있는 그곳으로..

30분 이상만 차를 타도 멀미를 하던 촌놈은 비행기를 18시간이나 타야 하는 미국으로 떠나간다..

아니 쫏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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