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Nov 05. 2019

다 지난 옛날이야기지만

사실, 죽고 싶던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사귄 영화배우 지망생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음주 습관이 지독하게 안 좋았다.


나는 술을 자주 마시지도 않을뿐더러, 예술가 체질이 아닌지 영감을 받고 미친 듯이 글을 쓸 수 있는 작가 스타일이 아니라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좋고 편했다.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써지든 안 써지든 책상 앞에 앉아서 쓰려고 노력하는 생활을 하는 게 마음에 안정감을 줬다.

      

그 남자친구는 소위 말하는 ‘필’을 받으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셔야 했고, 나는 그러기가 싫었다.

게다가 그 망할 ‘필’은 맨날 오는지, 거의 매일 그 정도로 술을 마셔야 집에 갔다.


멀쩡한 내가 그를 택시 태워 보내거나, 내가 그의 집까지 데려다준 적도 많았다. 그러고 고시원에 들어오면, 정말 많이, 어쩌면 처음으로 사랑했고 운명 같다고 느낀 남자친구지만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아직 내가 작가가 된 것도 아니고 그런 술버릇을 감당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작가가 된다고 끝이 아니라, 그때부턴 프로의 세계인만큼 어쩌면 내가 가늠한 것보다 더 지독하게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 친구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잘 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음주 문제로 몇 번 다퉜고, 고치겠다고 했지만 매번 하루 만에 약속을 어기곤 했다.


처음에는 그나마 좀 미안해하더니 점점 아무렇지 않아 하며 말했다.


지금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니가 내 옆에 있어주면 점점 나아질 거라고. 니 덕분에 변하고 싶어 졌다고. 옛날엔 고칠 마음도 없었지만 이젠 자신도 고치고 싶어 졌다고.


개소리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줘서 헤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의 개소리.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신보다 어린 내가 타이르고 짜증 내고 있는 그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한 말이거나. 3일도 아니고, 하루도 못 참는 노력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결코 노력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이런 감정 소모를 못 버틸 것 같았고 버티기가 싫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으로 글을 써서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간절하게 갖고 싶어서 그래서 서울에 올라온 것이니까 지금 이렇게 사랑 때문에 주저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놔준 것이다.

     

이미 여러 번 같은 이유로 이러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었고, 결국 두 번이나 헤어짐을 말했었다.


그러면 그는 울면서, 주변인들까지 동원해 믿어달라고, 노력하겠다고, 고치겠다고 해서 받아준 것이었다.


두 번의 헤어짐은 만나서 말했지만, 세 번째는 전화로 이제 나는 못 버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정도밖에 못 버텨줘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꼭 오빠가 배우로서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 마지막 헤어짐을 고하고 잠이 잘 안 왔다. 그리고 그 새벽에 욕설이 가득한 카톡을 받았다.


그 사람의 생활방식, 음주습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고칠 자신이 없어서 헤어지는 것이긴 했지만, 나는 그에게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을 응원하고 있었고, 좀 더 헌신적이지 못한 나를, 내 앞가림 때문에 도저히 누군가를 위해 헌실 할 수 없는 환경인 나를 어느 정도는 스스로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대략 7cm 정도의 카톡을 보내왔다. 다 구구절절 내 욕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더니 어떻게 니가 헤어지자고 할 수 있냐, 부터 시작해서 내가 걸레 같고, 처음부터 걸레 같았고, 난 싸구려고, 지방 촌년이고. 뭐 하여튼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었고 한결같은 뉘앙스였다.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고, 다 내가 잘못했다는 그런 취지의 내용. 죽을 만큼 사랑한다더니 겨우 이 정도냐, 진정한 사랑이면 씨발, 더 노력해야지, 왜 날 포기하느냐, 이 나쁘고 이기적이고 자신만 생각하는 걸레 같은 년아, 라는.


지는 노력 하나도 안 하면서.      


음주운전은 범죄가 아니라 습관이라며 그걸 고칠 생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인간의 기본도 안 된 새끼가.  





    

그런 놈과 헤어진 건데도, 내 마음은 괜찮지가 않았다. 그런 말을 듣고 나자 내 인생에 더 이상 사랑 따윈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을 내 운명이라고 믿었다니. 내가 이 정도로 사람을 못 알아보는 한심한 인간이라니.


이런 비참하고 온우주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살 바에는, 그냥 자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잠이 들고 다음날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라도 들면 다행일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터져 버렸다.      


울다가 잠이 들어도 채 두세 시간을 못 채우고 잠을 깼고, 잠을 깼다는 사실에 다시 눈물이 났다. 눈뜨지 않기를 바랐다.



당연히 현실은 변하지 않았을 거고, 그건 꿈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고, 다시 눈을 뜨면 그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생각해보면 그 남자는 그러고 나서도 잘 자고, 술도 변함없이 잘 마시고 다녔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이후 시간들은 고비이자, 높이를 알 수 없는 산이었다.     


얼마만큼 올라간 것인지, 내려올 수는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 산을 도무지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그럴 의지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럴 노력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온몸에 힘이 빠져 잠들었다가 눈 뜨지 않기만 바랐다.       


그러다 목이 부었다. 목이 터져라 운 게 아니라, 혼자 고시원에서 질질 짠 게 왜 목이 아프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이 부었고, 편의점에 왔다 갔다 하거나 카페에 가서 멍 때리고 오는 밖에 없는 별 거 아닌 일상생활조차도 불편했다. 며칠을 버티다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이대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아픈 건 또 싫은 것이 참 어이없다 싶기도 했지만 안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목이 붓고 잠겼다.


병원에 가서 증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정말 딱 일주일만 푹 자고 싶을 정도로 잠을 잘 못 잔다는 이야기를 했다. 목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잠을 못 잔 게 먼저고 그래서 아픈 거면 혹시 수면제 처방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일주일치만이라도, 아니면, 사 나흘 치만이라도.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때 든 간절한 마음이 지금도 기억난다. 딱 일주일만 푹, 정말 제대로 자고 싶다. 꿈을 못 이뤄도 좋으니 딱 일주일만. 제발.     


사실, 이 마음의 저변에는 잠을 일주일 잔다고 꿈을 못 이루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정말로 꿈이 안 이뤄져도 상관없으니 그냥 잠을 제대로 자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수면제를 처방받을 수 있으면 다른 병원도 돌면서 같은 이유로 수면제 처방을 받아서 모아 한꺼번에 먹고 죽으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부끄러워한 걸 보면, 그런 생각도 마음 한구석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혹시 일을 하세요?     


이걸 왜 묻지,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다.


지금이라면 내 성격상, 백수인데 잠이 안 오는 게 이 의사에겐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직장인인지 체크하는 것일까 이런 자격지심이 머리를 들었을 법도 한데, 그때는 그냥 뭔가 의지가 다 없었다. 그래서 그냥 순순히 대답했다. 일을 하지 않는다고.      


-일을... 따로 안 하시면, 매일 저녁, 두 시간 정도 걸으세요. 빨리 걷지도 말고, 그냥 천천히 매일, 걸으세요.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진짜 멍하게 있었다.


아마,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정도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 혹은 왜요, 라는 질문도 안 하고 멍하게 앉아 있으니 아마 다음 진료도 있고 하니 내보내려면 이유를 설명해줘야 한다고 생각이 드셨나 보다.      


-약이란 게 진짜로 필요하면 안 쓸 수 없지만, 사실 안 쓸 수 있으면 몸 스스로 좀 해결하게 해주는 게 가장 좋긴 하거든요. 일을 하시거나 나이가 많은 분한테는 권하기가 힘들지만, 시간이 많고, 젊은 분들은 약 대신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몸이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좋아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저는 오늘 당장 바로, 잠을 잘 자고 싶은데, 그랬다가 몸만 피곤하고, 그 와중에 잠까지 안 오면요?      


의사 선생님은 코로 한숨을 쉬고는, 그럼 한 달 동안 2시간씩 걸어보고도 잠이 안 오면, 그때 가서 처방해 드리겠다. 단 수면제는 드릴 수 없고 수면유도제로 3일 정도 처방해드리겠다, 뭐 이런 약속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저 한 달의 기한도 잠 못 자는 사람에게 엄청 긴 시간이다. 그런데 그걸 의심할 기력도 없었다. 게다가 수면제와 수면유도제의 차이가 뭐길래, 수면유도제면 어쨌든 수면제보다는 한 단계 낮춘 효과의 약일 텐데 그걸 왜 한달 뒤에야 처방해 주겠다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논리적으로 질문할 기력이 없어서 편도선 약 처방전을 받아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머리가 멍해서 다른 걸 할 수도 없어서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그날 저녁부터 2시간씩 걸었고, 3, 4일째 되던 날부터 잠을 잘 잤다.      


어쨌거나 백수였고, 큰돈은 아니지만 당장의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닌 금액의 돈이 수중에 있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시원 인근의 산책하기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었고, 매일 저녁 그 길을 2시간씩 걸었고, 집에 와서 맥주를 반캔 정도 마시고 자면 정말 죽은 듯이 푹 잘 수 있었다.      


그러다 그게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자, 이성을 찾았다.     


잘못된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놓지 못하는 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 이라는 생각이 머리와 가슴에서 동시에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강렬한 헤어짐을 당한 후,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계속 그가 정신을 차려줬으면, 저 카톡은 너무너무 화가 나서 날 너무 놓치고 싶지 않아 술 때문에 실수로 한 말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나에게 사과를 하고 돌아와 줬으면 하는 불가능하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바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만나는 동안에도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백수였던 만큼 그의 일상에 더 밀착해서 노력을 했어야 하나, 좀 더 세련되고, 강하게 그를 고치려고 했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많이 했다. 다시 시작하자, 그래, 새롭게 노력해서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도 솔직히 안 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못한 대신, 판단력과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헤어지기로 판단한 내 선택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들던 생각이었다. 가끔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틀린 생각도 내 생각이었지만.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절대로 해결 못 하는 문제는 포기하는 것도 문제해결의 하나라는 걸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것도 안다는 것이다.


그걸 다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하고 싶은 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이성이 계속 아니다, 아니다, 하는데도 멍청한 마음이 그래도, 그래도, 를 반복하느라 이성과 마음, 그 둘 사이는 계속 평행선을 그릴 것만 같았다. 아마 잠이 안 온 이유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한달째 잠을 푹 자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맑게 갠 기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출근을 잘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