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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Nov 04. 2019

출근을 잘했다

미안하게도

내가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들의 글 중에는 최근 몇 주 동안 ‘매일 쓰기로 했다’라는 새 글 알림이 몇 번  왔다.


볼 때마다 나도 써야 하는데, 쓰고 싶은데 하면서도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무얼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가 설리라고 말하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 때문에, 그녀를 내버려 둔 나 자신 때문에 잠이 잘 안 왔다.      


그런데도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설리에 대해 뭘 쓰고 싶은지 너무 많은데 어느 것부터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있을 때, 설리는 의연해 보였다. 이런 댓글을 보면서도 이런 태도로 응할 수 있는 멘털을 가질 수가 있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선정적인 문구가 들어간 그녀와 관련된 기사를 접하거나, 혹은 그런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좀 심하다 싶긴 했지만, 그 목소리를 겪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었고, 나도 내 할 일을 하느라 바빴고 그래서 가끔 어떤 기사나, 이 댓글은 좀 심하다 할 때도 있었지만, 설리는 버틸 수 있는 일인가 보다, 라고 나는 생각하고 말았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 기준에는 견딜 수 있는 만한 고통이라고 생각했고, 먹고 사는 게 바쁜 1인 가구인 나로서는 연예인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 솔직히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마 다들 그랬던 것처럼.          


IT 강국의 오명 '악플 천국'…'소수의 악플러' vs '침묵하는 다수'

http://news1.kr/articles/?3745242          


이 기사를 봤다. 그 침묵하는 다수 중에 한 사람이 나였다.      


그렇게 그녀를 응원하는 소수의 목소리와 그녀를 비난하는 소수의 목소리 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있는 거대 다수의 침묵이 있었다. 그 거대 다수 중에 나도 있었다.           


칼 같은 말의 후유증은 화가 나는데 무기력해진다는 거다.


그래서 소수의 악플러들은 그녀가 일일이 반격하지는 못하리라는 걸 무의식 중에 계산하고 짓밟았을 거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끔 무기력을 이겨내고 댓글을 달았다. 그렇게 그녀는 괜찮은 척하느라 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절대다수. 그 속에 내가 있다. 나는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 어떻게 져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무거운 죄책감과 책임감을 1/n 하면, 아주 많은 1/n이 되므로 아주 무겁지는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안일했던 내가 무참하고 한심한데, 그래도 나는 별일 없다는 듯이 그 이후로 출근을 잘했다.


출근해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가끔 문득 설리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멍해져서 뭘 하려고 했는지 까먹기도 했지만 엄청난 실수는 아니었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소소한 대화도 나누고, 다른 연예인 얘기, 주말에 본 영화 얘기도 하고, 집에 와서는 유튜브로 예능을 보며 이따금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전, 밥 먹으러 가다 또 그녀 생각이 났고 갑자기 손에 힘이 풀려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살면서 핸드폰을 심하게 떨어뜨려본 적이 없는 나였는데 처음으로 핸드폰이 박살 났다.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덕분에 아주 조금이지만,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악플러들이 손가락으로 칼을 만들어 누군가 심장에 꽂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 손가락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정신줄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으면 미안하니까.      


그래도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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