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서
그러고 S와 2차를 갔다. 둘 다 꽁해진 마음이 다 풀리지는 않았으니까 풀어야 했다.
술을 한참 마시고 있는데 당시에 만나던 남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쯤 집에 들어갈 거 같은지 물어보는 전화였다.
한 11시쯤 들어갈 예정이라고 말하자 그 친구가 그럼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술 마시는 건데 방해하는 것 같으니까 자꾸 연락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밤늦게 들어가는 거 걱정되니까 들어갈 때랑 집 들어가서 자기 전에 연락 한 번씩만 해달라고 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10시 반쯤 돼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버스 탔을 때 집 들어간다고 연락을 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전에 연락을 하기가 너무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가는 길에 집에 들어왔고, 나 지금 잘 거야,라고 했다.
문제는 항상, 자기 전에 연락하던 습관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씻고 누웠을 때 나도 모르게 ‘나 이제 진짜 잔다.’ 하고 다시 톡을 보낸 것이다.
1시간 전에 지금 잔다고 했던 여자 친구가 다시 ‘이제 진짜 잔다.’ 고 연락을 하니까 그 친구 입장에서 기분이 안 좋고 뭔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는지 곧바로 전화가 왔다.
술도 많이 마셨고, 풀기는 했지만 싸우기도 했고, 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에 좀 울어서 기운이 없었다. 그 와중에 잠들었는데 전화 때문에 깨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 친구가 왜 아까 전에 집이 아닌데 집이라고 한 거냐고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고, 나는 피곤하니까 내일이나 주말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며,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지금 바로 오겠다고 했다.
40분쯤 후, 그가 집에 왔고 나는 짜증이 북받쳤다. 오겠다고 한 순간부터 사실 조금씩 화가 나고 있었다. 아까 한 그 생각을 이제 그만 하고 싶은데,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속에 다시 뜨거운 기운 같은 것이 올라와, 아까 S와 했던 이야기들을 다 해줬다.
만난 지 3달 정도 되었던 남자 친구는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랑 꼭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연애가 행복하고 좋고 계속해서 만나는 건 상관이 없지만, 꼭 너와의 결혼뿐만이 아니라 결혼 자체에 대한 생각이 없긴 하다고 대답했다. 사람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만 현재 내 입장은 그렇다고.
그리고 결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상황에서 오히려 내 입장을 더욱 분명히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계속 만날지 말지, 그 친구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낙태에 대해서 내가 어떤 입장인지, 화를 내면서 말을 하는데 어제까지 사이좋았던 우리가 싸울지 모른다는 생각과, 그래서 오늘 일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이별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아까에 이어 또다시 비난받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비난받게 되더라도 나에게 이건,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가장 컸다.
나는 이런 여자인데 나와 계속 만나고 싶고 결혼까지 하고 싶냐고. 아이도 싫어하고, 그래서 안 가질지도 모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임신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지울 생각인 여자인데 괜찮겠냐고.
남자 친구는 그의 어머니가 미혼인 상태에서 낳기로 결심해서 태어난 친구였다.
그의 어머니가 이 친구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 친구 아버지 집안에서 어머니의 임신 사실을 알았었는지 모르겠으나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들이 사망한 상황에 며느리로 들어오라고 할 수도 없지 않냐고, 우리 아들 못 잊지 말고, 남은 네 인생 살라고 했다며 다독이며 결혼 얘기가 조용하게 정리가 되었고, 따로 연락을 하거나 누가 자신을 찾아온 적은 없었다며 친가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 이야기도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자신이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주워듣고 끼워 맞춰서 알고 있는 정도라서 정확히는 모른다고. 하지만 친가 쪽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없고, 친가 쪽에서도 자신을 모르는 채로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어쨌든 그 친구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로 하셨고 남편 없이 26살에 그 친구를 낳았다. 기른 건 외할머니였다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제주도에서 장사를 해서 거의 보지 못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친구 나이 20살 때 그의 어머니는 타지인 제주도에서 46살에 숨을 거두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녀였다면, 그 나이라면, 지웠을 거 같아서, 그래서 그를 만나는 게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그의 어머니 입장이라면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하기 싫어하는 종류의 희생으로 태어난 너를, 내가 절대 하지 않았을 희생으로 태어난 너를, 내가 계속 만나는 게 너무 불편하다고. 그 말을 하면서, 술기운이 컸겠지만 화를 내다 말고 펑펑 울고 말았다.
그 친구가 말했다.
-시은아, 잘 들어. 너는 우리 엄마가 아니야. 예전에도 니이런 생각 말해준 적 있는데, 나 그 생각이 나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이 문제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놀라긴 했지만.
너는 나한테 우리 엄마가 한 선택이 훌륭하고 너무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전혀 아니야.
어머니가 돈 버시느라 고생하신 거 맞지만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생활비를 제대로 보내셨을까 싶다. 돌아가시고 나서 알게 된 건데 빚도 꽤 있었고 지금도 그거 내가 갚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어머니가 번 돈으로 내가 컸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도, 지금도 내 입장에서 좋은 어머니다, 훌륭한 어머니다, 생각 든 적 한 번도 없어.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 왜 태어났나 싶고 그래. 그냥, 나 낳아주신 분이야.
네가 내 어머니에 대해서 모성애 강하신 분인 거 같다고, 너는 모성애 없다고 죄책감 든다고 한적 있어.
나, 우리 어머니한테 그런 게 있었나 생각해본 적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낳아주셨다 그게 끝이고, 모성애 있으셨는지 모르겠더라. 우리 어머니가 모성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그냥 니 환상 같아.
그리고 감사하다, 고맙다 이런 생각도 잘 모르겠어. 나 너무 고생하면서 컸고 사실상 외삼촌, 외할머니가 나 길러주셔서 그분들한테 감사하지.
엄마 살아계실 때, 제주도에서 술 마시고 취하셔 가지고 집에 전화 걸어서 맨날 할머니한테 화냈어. 힘들어 죽겠다고, 나 왜 이렇게 살아야 되냐고. 나한텐 한 번도 그런 적 없으셨긴 한데 어차피 소리치는 거 다 들렸어.
불쌍한 할머니, 죄인처럼 그 전화 듣고 계시는 거 보면서 나 맨날 그 생각했어. 엄마가 집에 전화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가끔 집전화 울리면 엄마 전화일까 봐 얼마나 싫었는데.
네가 생각하는 거, 잘못된 부분 하나도 없어. 죄책감을 네가 왜 가져야 돼? 도대체, 너 왜 그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거야? 니 인생은, 니 거야. 아기를 낳고 말고 하는 문제든, 뭐든.
선택 이후에 문제 해결 하나하나가 다 니 몫인데, 네가 선택하기 싫은 걸 선택하라고 할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어.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해도 되는 문제 아니야. 그 손가락질하는 인간 생각이 틀려먹은 거야.
그러니까 제발 우리 엄마 훌륭하다는 생각도, 네가 아이를 원치 않으면 지우겠다는 생각이 죄책감이 드는 일이라는 생각도 그만 했으면 좋겠어. 니 인생이니까.
울면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너의 어머니가 널 낳았겠구나. 본 적은 없지만 너의 아버지도 자신의 연인이 무슨 선택을 하든, 누구보다 그녀의 편이 되었을 사람이었겠구나, 그래서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사람의 흔적인 둘의 결과물인 이 친구를,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겠구나. 26살밖에 안 된 나이에, 아이를 지우고 자기 인생 좀 더 편하게 사는 길보다, 그를 잊지 않고 그와의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구나.
이 정도로 연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남자라면 믿고 기대며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