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의 비기닝

엄청나게 질척거리고 말았다

by 시은

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이 매개가 됐든 어쨌든 그 이후 나는,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들에 뭔가 좀 내 감정을 탈탈 갈아 넣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잘 풀린 적도 있었지만, 쪽팔리는 일도 있었다. 질척이는 것도,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유치할 정도로 질척여서 결국 이불 킥으로 완성되게 말이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9년 전 이야기이다. 이 정도로 질척이는 일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이 얘기를 하자면 눈 앞에 있을 땐 이라는 글과 퍼스트 클래스라는 이전 글의 정보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안 읽어도 내 질척거림을 관람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눈 앞에 있을 땐

https://brunch.co.kr/@ddocbok2/38



퍼스트 클래스

https://brunch.co.kr/@ddocbok2/39




퍼스트 클래스 일 이후 그와 나는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연애를 하려다가 접혔고, 이후에도 미성숙한 나 때문에 연애로 발전할 수 없었지만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이 친구에게 했다는 이유로, 그래서 이 친구랑 소소한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평소에 가질 수 없었던 마음의 안정감을 꽤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어떤 일에도 이 친구가 나를 감정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가족한테서도 받아본 적 없던 감정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느낌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하지만 이 좋은 분위기가 다시 연애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연애가 타이밍이라고 하는 건 서로가 좋아하는 타이밍이 맞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도 결국 두 사람이 같이 있을 시간이 더 있는가 하는 타이밍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2009년에 그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나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사귀기로는 했으나 한 달도 못 채우고 끝났었다.



그리고 2011년, 그가 하고 싶어 하던 방송국과 연계된 일자리를 얻게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가 부산에 있을 때도 서로 연락만 좀 주고받았을 뿐 각자의 삶에 필요한 노력들을 하느라 자주 만난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멀어졌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가 서울로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내가 우리 다시 만나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는 자신 없다며 여러 번 거절했지만 내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와 계속해서 연락하며 무슨 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계속 보고 싶었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기보다, 존경했고 그를 보고 뭔가 배우고 싶었다.


친구 사이에 존경이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존경이라는 말 외에는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없다.


역시 장거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두 달여를 못 채우고 이번에는 그가 먼저 그만 만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에 중학생 때 사귀었다가 헤어진 여자 친구와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다시 그 친구와 사귀어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친구는 지금 자신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지금 자신의 말이 양다리라고 생각된다면 그것도 미안하다고.


-아....


내가 저 얘기를 처음 듣고 한 말은 저게 다였다. 그리고 Z가 나에게 덕담류의 말을 속사포처럼 하기 시작했다.



아직 너는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안 된 것 같지만 너도 때가 되면 꼭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너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너 되게 예쁘다, 평소에 무표정한데 웃을 때 보면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예뻤다, 대단하지 않은 나에게 장거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사귀자고 말해줘서 놀랐다, 힘들 때 사귀게 돼서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너도 꼭 작가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얘기.


한 귀로 들리고 한 귀로 빠져나가는 그의 말을 듣다가,


-그냥, 우리 친구로라도 남으면 안 돼?


라고 그의 말을 잘랐다. 그가 말을 멈춰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시은아. 니가 말했잖아, 너는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고. 내 생각도 그래. 근데 그런 우리가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맞다. 내 생각은 지금도 그렇긴 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를 놓기가 싫었다.



사랑해서라기보다, 잘못한 것도 없이 도대체 왜 내가 차여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이 친구에게 뭔가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았고 배울 게 남았고, 그래서 그 친구와 가까이 지내며 삶을 대하는 방식을 배우고 싶기 때문에 이 관계가 끊어지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외모가 멋있다고 할 수 있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친구가 사는 방식이 멋있었다. 퍼스트 클래스 속에 나온 것처럼 나한테 해준 말이나 행동도 멋있었고, 형편없는 급여와 형편없는 처우를 감내하면서 원하고자 하는 일의 밑바닥에서부터 묵묵히 그 일을 하는 것도 멋있었다.



그래서 계속 보면서, 배우고 싶었다. 본받고 싶었다. 연애답지 않은 연애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지금의 나라면 묻지 않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

놓치기가 싫으니까 아무 말이나 막 나왔다.


-너 아까 나보고 예쁘다며. 되게 예쁘다며. 웃을 때 환해지게 예쁘다며. 그런데 왜 헤어져야 되는데. 걔가... 나보다 훨씬 예뻐?


그 친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근데 왜.


-냉정하게, 그래, 친구가 너보다 안 예쁘긴 해. 그런데.... 하.... 그게 지금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사람이 필요하고 나한테는 그 친구가 소중한데.



해리포터가 내 친구였어야 하는데.

말포이 말고 나한테 이 말해줬어야 하는데.


입 닥쳐 김시은.




하지만 내 옆엔 해리포터가 없었다. 내 입에서는 또 아무 말이나 나왔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몇 번째로 예뻤는지 물어봐도 돼?


-하... 그게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시은아, 너 예뻐. 니가 더 예쁜데 그래도 너랑 만나고 싶지는 않아.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 전화를 안 끊은 걸까. 그 와중에 생각을 하던 Z가 말했다.


-세 번째.


첫 번째는 아닐 것 같았지만, 세 번째라니 좀 실망을 했다.

정말 그만 물어봐야 했는데 저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은 지 얼마 안 되어선지 그냥 그 친구 마음 구석구석 밑바닥까지 다 알고 싶었나 보다.


이 정도까지 매달릴 필요는 없었는데.


그에 대한 내 마음이 호감이었지, 열렬한 사랑까지는 아닌 것도 알고 있었고 내가 그의 눈에 몇 번째로 예뻤는지 확인한다고 그와 나의 관계나 그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을 듣자 내 마음속 또 다른 질문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마지막 질문이라고 해놓고 또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그만. 제발 그만.


-첫 번째랑 두 번째, 우리 학교 애야? 나도 아는 애야?


-시은아, 미안한데 그냥 세 번째 정도인 거 같고 첫 번째 두 번째가 누구인지까지는 기억 안 나. 그리고... 지금 이게 왜 중요한데. 그리고 이제, 우리 연락 안 했으면 좋겠다. 끊을게.



그렇게 차였다.



사실 저렇게 차여놓고 한 1년 정도 뒤에 다시 연락을 해봤다.


그때 그 친구랑 헤어졌으면 다시 시작하자고 하고 싶었는지, 그냥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서였는지, 정확한 내 마음의 비율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연락처가 있어서 문자를 보내봤다.



잘 지내니? 하고. 그리고 너 누구냐고 답장이 왔다. 내 번호도 지웠던 거다.



잘못 보낸 척 죄송합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다.



아주 세게 차인 축구공이 된 기분이 들어서, 그날 이후 종종 침대에서 축구선수처럼 이불 킥을 좀 해야 했다.



꽤 오랫동안.



저 망할 놈의 책.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 강렬한 책이라면 나 혼자만 이렇게 질척거리며 살았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다들 쉬쉬하고 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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