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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Jul 14. 2019

눈앞에 있을 땐

기회가 기회 같지 않지

성실기를 시작할 때, 첫 글에서 이런 걸 써도 되려나 여덟 글자를 쓸 때부터 사실 이 글을 올리려고 그 앞에 그 모든 글들을 썼다.


나는 친구들과 이야기의 분위기가 막 달아올라 여기저기로 흩어질 때, 갑자기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 우리 무슨 얘기 하다가 나왔지?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어떤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하다가 나왔는지 짚고 넘어가는 습관이 있다. 작가지망생들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도 무슨 이야기에서 시작해 지금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사람들이 알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유병재 블랙코미디 성희롱 예방 비디오 덕분에 생각나서 쓰게 된 이야기다. 방송인 유병재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성희롱 예방교육 영상을 보았다. 내용을 옮기자면 이런 내용이다.     


“저는 성희롱, 성추행하는 새끼들이 굉장히 싫어요. 법으로 기업에서도 의무교육을 하잖아요.

근데 거기에서 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 새로운 지식은 없어요. 사실 다 알고 있잖아요. ‘아, 그렇구나. 상대방 의사를 존중했어야 되는데! 그걸 몰랐네! 알았어요.’ 이런 사람 없잖아요.     

누구도 성희롱하려고 성희롱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내가 아까 점심에 짜장면 먹었으니까 이따 오후 2시쯤에 성희롱 해야겠다, 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따 퇴근하고 다이소에서 장 보고 인터넷에다 8시쯤에 성희롱 한번 해야지.     


이런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잘못인 줄 모르고 하는 거지.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성희롱 예방교육’은 비디오예요. 비디오인데 성희롱하다 ㅈ된 새끼들 인터뷰를 한 시간 동안 틀어주는 거예요.     


아유, 내가 X발, 왜 성희롱을 해가지고, 내 인생 조지고. 회사에서 짤리고. X발, 아이고 ㅈ됐어 X발. 여러분은 성희롱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 인터뷰를 한 시간 동안 틀어놓으면 어떻게 보면, 공포가 가장 좋은 교육일 수 있으니까.“      


이게 2017년 9월 영상물인데 이 아이디어로 만든 인터뷰비디오가 따로 제작된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제작되어 있는데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는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 회사는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따기가 힘들어서 아직 제작이 안 되었을 것 같다. 솔직히 누가 출연하겠는가.     


거기에다 비디오라는 것은 모두들 알다시피 영상물은 찍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자막 넣을 사람도 있어야 되고, 편집도 해야 되고, 설명도 어쩌면 조금 들어가야 되니 인터뷰이가 따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영상제작이라는 게 이렇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제작비가 든다. 제작비를 절감하는 차원에서 내가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 유병재님 영상물에 모티브를 얻어서 쓰는 내 실제 경험을 저 동영상 본다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나는 신입생 때 오리엔테이션과 학부 엠티를 가지 않았었다. 대학을 총 7년 반을 다녔는데 그런 학부모임 같은 걸 전혀 가지 않았는데 7년만에 졸업할 날이 얼마 남지 않자 그래도 대학생활 마지막인데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것을 안 가보고 졸업하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에 민망하지만 가기로 했다. 보통은 입학할 때 하는 거지만, 나는 졸업할 때 가게 된 게 조금 어색하긴 했다. 차라리 매년 갔으면 나았을 텐데. 한 번도 안 가다가 하필 졸업년도에.      


학부 엠티다 보니 내 전공인 미디어창작과 뿐만이 아니라, 광고PR과, 방송과, 애니메이션과, 영화과 등 모든 학부생들이 왔다. 꿈과 희망에 부푼 신입생들은 풋풋했다. 이 분야의 취업이 얼마나 바늘구멍인지 현실을 아는 나는 꿈과 희망 같은, 낭만적인 마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오래간만이어서, 신입생들과 딱히 대화를 하지도 않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오길 잘 했다고, 재미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 그 선배가 내 옆에 앉아서 계속 이런저런 얘기를 걸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추근거리는 느낌은 없었지만, 이 사람이 날 여자로 느끼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고, 민망해하면서도 조금은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성으로부터 매력을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니까.      


뭔가 자신감을 얻어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글에 대해 평소보다 좀 구체적으로 말했었는데, 어쩌면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하는 그런 진부할 수 있는 고민이었는데 그가 응원의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아, 이 사람이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고, 술에 살짝 취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 존재감 없이 학교, 집 왔다갔다 하는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누군가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누군가 내가 하는 일을 응원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잠시 어딜 가자고 했다. 나는 가긴, 어딜 가요. 지금 분위기 좋은데, 라는 정도의 말을 했던 것 같다.

잠깐만 같이 나가자고 했고, 나는 추운데, 하면서 일어났던 거 같다. 그 때 ‘추운데’ 라고 말하던 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앙탈이 묻어있었나? 내가 끼를 부렸나? 하고 아주 오랜 시간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애교 있는 애가 아니었고, 내 뉘앙스가 그랬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애교 있는 말투가 강간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가 내 팔목을 잡고 데리고 간 곳은 콘도 안에 있던 방이었다. 콘도의 큰 거실에서 사람들이 주로 대여섯명씩 둥글게 앉아 술을 먹었고, 문 입구 쪽에는 작은 방이 두 개 있었다. 거실 가까이에 하나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콘도 구조를 파악하며 놀지는 않으니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데리고 간 방에는 남자애 한 명이 자고 있었는데, 그가 야, 나가. 빨리 나가. 했던 기억이 난다.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 남자애가 나가고 나서 그가 문을 잠궜을 때다. 아주 미묘하게 쎄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좀 전까지의 좋은 분위기를 떠올리려 애썼고, 이 상황은, 분명 아까 그 분위기의 연장일 거니까 고백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수줍음에 떨며, 한번만 하자, 고 말했다. 고백이 아니고. 내 겉옷을 벗기려고 하면서, 한 번 하자, 고 말했다. 두려움이 확 밀려왔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수줍음이, 그의 태도에는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수줍음이 가득한 태도와 표정과는 별개로 그의 손의 악력은, 나보다 월등히 셌다. 그리고 나는 그 악력이 그의 최대치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선배와 학교에서 마주치고 인사한 적은 있지만 밥 한번 같이 먹은 적이 없었고, 술자리도 처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가며 어떻게 상처받지 않게 에둘러 거절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내 의견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발휘해서 그를 밀어낸다 해도 그가 적당한 악력으로 발휘한 힘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순간적으로 했다. 그는 키 185cm에 95kg은 나가는 체격이었다.      


그의 얼굴은 원래 순한 상인 탓도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험악해 보인다기보다, 수줍은 표정이었다. 얼굴만 본다면, 그는 수줍음에 떨고 있는 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강한 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내 어깨에 가해지는 그 악력이 머뭇거림과 공존하고 있다는 걸 나는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머뭇거림, 그의 선함에 호소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을 그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명료하게 묘사해서, 그의 내면에 있던 선함을 끄집어내서, 나를 강간하지 않도록 그를 설득해볼 수도 있고 그게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설득에 실패했을 경우, 내가 치러야 할 댓가가 너무 컸다.      


타짜를 꿈꿨던 나로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잃을 게 큰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모두에게 바람직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몸에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는 그 와중에도 수줍어하며, 내 몸의 어딘가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의 숨결이 내 목 가까운 곳에 닿는 것을 느끼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데, 그가 언제 공격적으로 변할지 알 수 없어서, 공격적으로 변한다면 난 진짜 물리적으로 이길 자신이 없어서, 최대한 불쾌한 티를 전혀 내지 않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잠깐 하자, 정신이 좀 돌아왔다.      


-선배, 알겠어요. 잠깐 기다려봐요.

-왜, 뭐 때문에.

-밖에 사람들 많잖아요. 갑자기 누가 들어오려고 해봐요. 하다가 분위기 깨져봐요. 짜증나지 않겠어요?

-그냥 빨리, 한 번만, 한번만 하면… 안 돼?     


사실 이 순간이 제일 무서웠다. 나는, 이때까지 나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침착한 성격이었다.


-알겠어요. 한다니까요? 근데 여기서 하다가 제가 신음소리 내면 어떡해요. 밖에 동기랑 후배들, 엄청 많은데. 저 아는 사람도 별로 없긴 해서 명예랄 건 없지만, 선배는 남자니까 괜찮지만, 저는 여자잖아요.   

-지금, 바로 하고 싶은데.

-조용한 데 가면 밖에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잖아요. 그게 더 낫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밀어내려고 잡고 있던 그의 어깨에 있던 손으로 그의 팔을 쓸어내렸다. 그것도 천천히.

이런 공포스러운 순간을 묘사하는데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게 적당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팔을 쓸어내리며 스스로에 대해 이런 생각을 들었다,      


나, 겨우 25살인데 되게 노련한데?      


하는 생각. 내가 이런 인간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그때 뭔가, 진화한 기분이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내 안의 세포가 이전의 세포와는 다른 것으로 바뀐 것 같은, 진화한 것 같은 기분.  


어쩌면 동물들이 진화하는 것도, 그러지 않으면 죽거나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은 어떤 상황적 절벽에 떠밀려 생존을 위해 어떻게 보면 몸 안의 세포가 저질러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비해, 생존에 유리하게 발전하는 것인데도 진화한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조절가능하지 않은 능력이 생존의 위협 앞에서 절대적으로 월등해져버린 느낌이었다. 침착함이 노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월등해져버린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극도로 내몰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상상조차 못했던 내 안의 침착함과, 가져본 적 없던 노련함이 나에게는 낯설었고, 그의 수줍다고 해야 할까, 긴장한 표정 때문에 그의 선함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싶어하는 내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말해, 지금 이 사람에게 니가 하려는 건 강간이라고. 내가 지금 겁에 질려있다고 고백하고, 니가 하려는 게 강간이라고,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해.’     


라고 내 안의 선한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봤을 때 나는 할 생각이 없는데, 나랑 할 생각에 기대하고 긴장한 그의 표정이 보였고 나는 다시 한 번 내 안의 선함과 싸워야 했다. 심지어 그의 손은 떨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 내용대로 말하고 싶은 마음, 나는 그 마음을 곧바로 무시했다. 저 말을 듣고 사실은 내가 그와 한 번이고 뭐고,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을 경우, 그의 선한 마음이 일어나주면 고맙겠지만, 그가 본능대로 할 경우 나는 강간당한다. 오히려 더 무섭게, 강력하게 강간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문제에 있어 남자의 이성, 또는 선한 마음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성 경험이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당하고, 피를 흘리게 된다면, 이 피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무섭고, 그 피 묻은 이불 등을 떠올리자, 이걸 밖의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수치심은 내가 극복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극복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원래도 싫었지만, 더욱 이 상황이 내 첫 경험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그가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진짜 금방… 올 거지?

-금방 오죠. 다들 이렇게 모여 있는데 빈 방 찾는 게 뭐 어렵겠어요.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당연히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다음날 선배는 우리과 후배를 통해 내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 후배가 나에게 그가 내 연락처를 묻는 이유나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내 연락처를 그에게 함부로 준 것도 불쾌하지만 그 문제는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그가 나에게 연락을 했다. 사과한다고 했다.


나는 사과의 의미로 선배에게 한달동안 중앙도서관 앞에서 1시간동안 사람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주라고 했다. 주말은 빼줄 테니 하루도 빠지지 말고.      


선배는 5일 하고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한달을 채우라고 했다. 하기 싫다고 했다. 취업 준비 때문에 바쁘니 그만하겠다고 했다. 난 그걸 이유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한달을 채우라고 했다. 그때의 마지막 문자내용이 기억난다.     


-싫어. 니 마음대로 해.     


내가 학교 애들한테 아이스크림 나눠주는 걸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는 학교 친구들에게 학우애를 베풀라는 것으로 오해했나 보다. 내가 그렇게 학우애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 당시 내 머리로 생각할 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 시간, 돈이다. 지금도 변한 건 없다. 중요도의 순서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내 의도는, 범죄를 저지르려 한 인간에게 남들과 똑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할 목적으로 유치하지만 그럴듯하게 패널티를 주기 위해 내 머릿속에서 최대한 짜낸 방법이었다. 시간 낭비시키기 위해 멍때리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다고 저 일로 돈을 달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그랬다면 꽃뱀 취급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선배의 건강이나 혹은 그 가까운 사람의 건강이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남은 건 시간을 들여서 뭔가를 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도 모양 빠지는데 도서관 인근에서 숨어서 지켜봐야했다. 내 시간까지 할애해가면서. 니가 아이스크림을 나눠준다고 해서 내가 딱히 얻는 이득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어떤 패널티든, 감수한다는 것을 통해 반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하지 않았다.     


나는 순발력과 노련함으로 그 순간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그 선배가 나에게만 그랬을까? 성적 범죄자들의 경향을 볼 때 진짜 딱 한번, 그랬던 게 걸리는 것 같지는 않다.      


9년전, 싫어. 니 마음대로 해. 라는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마음대로 할게요. 선배.      


동서대학교 01학번 82년생 개띠 김민형씨.      


니가 하려고 한 건 강간이었고 니가 취업하겠다고 내팽개친, 내가 준 한달의 사과 기간은 니가 평생 되돌릴 수 없는 기회였다는 걸 지금 깨닫게 될 거다. 병신아.      


유병재님이 말한 비디오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정도면 아주 나중에라도, ㅈ때문에 ㅈ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수 있을 테니까 예방으로서의 효과는 거둘 수 있을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스쳐지나가듯 한 성희롱도 아니라 성폭행이었으니까 더 예방효과도 뛰어나길 바란다. 아무리 강간 시도할 때 수줍어하며 설레고 떨렸고, 긴장되었다 해도,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섹스가 아니란 걸 깨닫길 바란다. 심신은 미약해도 물리력은 강했잖아.


그리고 그때 내가 피해잔데, 반성하는지 확인한답시고 내가 잠복 감시하는 것도 솔직히 쪽팔렸지만, 반성을 확인하고 싶어서 저런 아이디어까지 짜낸 것도 분하다. 내 글이나 더 쓸 걸.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반성의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순진했다. 그럴 인성이면 강간시도도 안 했을 텐데.

     

이 글의 주인공이 처벌을 받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내가 실제 물리적, 신체적 피해를 입은 건 아무것도 없어서.


한 열두 개 정도의 글을 올렸을 때, 조만간 이 글을 올릴 거라는 생각에 출근길이 즐거웠다.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를 들으며 그 생각을 하면 출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매일매일 힘들지 않았다. 노래가 원래 좋은 탓도 있겠지만 개자식에게 빅엿을 먹일 생각에 매일 즐거웠던 이 즐거운 출근길을 오래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하기로 했다.


지난 7월 19일 인천시의 한 아파트에서 여중생이 투신해 숨졌다는 기사를 지난 금요일에 봤다. 여중생이 살아 있을 때 또래 남학생들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나이 15살이었다.


그녀의 가족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글을 올린 글을 읽었다. 그녀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15살에 겪은 고통은 스케일이 작지만, 그녀가 해버린 행동을 나역시 하려고 했었다. 아마 그녀가 느낀 고통은 내 고통과 종류는 같을지 몰라도 크기는 내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거대했을 것이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살아있는 동안 그 기억을 떨쳐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을 것이다.


좀 더 이 글을 올리는 걸 계속해서 미루고 싶었다. 언젠가는 올릴 거지만, 1년 혹은 6개월만 더 즐겁게 출근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 내용의 기사를 보고 15살 때의 기억, 그 무기력하고 죽고 싶어하던 내가 떠올라서 일이 손에 잡히지 없었다. 나는 이제 하루 그러고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청원을 한 가족들은 그게 매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원 속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을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그 소년들과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던 9년 전의 한 인간이 누구인지 알리고 그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 알리는 것 정도라도.


반성이나 용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반성이나 용서는 피해자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는게 의미가 있지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반성하는 척은 미디어에서 너무 많이 봐버렸다.


처벌 안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이 네가 이런 짓을 시도한 인간이라는 건 알기를 바란다. 시간이 좀 많이 늦긴 했지만 처벌은 안 받더라도 여론의 맴매는 좀 맞아야지. 28살이 범죄와 범죄가 아닌 것을 구분 못할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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