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 편일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라는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책이 있다. 시나리오 쓰려고 읽었던 책이었지만 글보다 내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책이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생각을 글로 써도 될까,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생각하지 말고 써라. 우리 가족 이야긴데, 엄마 이야긴데, 비난하지 않을까, 내 내밀한 상처인데 써도 될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건 생각하지 마라.
마음속 밑바닥, 부끄러울지 모를, 비난받을지도 그 마음을 꺼내라.
그걸 써라.
두려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하나도 남김없이 다 끄집어내서 이야기로 만들어라. 글로 써라. 그게 진짜 작가의 방식이다.
이 책의 가르침대로 쓰기도 했고 또, 그렇게 살기도 했다.
몇 년 전, 추운 겨울날 아는 동생과 오랜만에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인지 모르겠으나 임신과 낙태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대화 중에 나오게 되었다. 아마 가게에 있던 TV로 관련 뉴스가 나왔던 것 같고 그 주제가 우리 사이로 스며들어 대화로 이어졌다. 생각보다 뜨겁고 진지하게 치열하게.
이게 우리 사이의 뜨거운 감자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우리는 둘 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한다는 공통점도 있는 데다가 나는 지금 다니는 직장이 비전이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별로인데 어떻게 이직을 해야 하는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고, 그 동생은 원하는 방향으로의 취업 걱정으로 인해 서로 먹고 살 고민하는 게 비슷해서 서로 마음을 많이 터 놓던 편이었다. 게다가 서로 술 마시는 빈도나 스타일도 비슷해서 꽤 가깝게 지냈는데 각자가 이 문제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나는 원치 않는 임신이면 연애는 물론, 결혼을 했더라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 동생은 그런 생각을 가진 나를 불편해했다.
-언니, 어쩜 그렇게 냉정하게 말해요? ‘언니 자식’이라는 생각, 안 해요? 아니, 안 들어요?
-진짜 상황도 아니고 만약이라는 건데? 그런 일 없게 우선 앞으로 쭉 피임 철저히 하며 살 생각이라고. 그리고 이게 왜 냉정하면 안 되는 문제인지 모르겠고 비난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S야. 내가 왜 아직 무슨 행동을 한 것도 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한테 비난을 받아야 되지? 그 존재를 왜 꼭 ‘내 아이’라고만 생각해야 되지?
진짜 만에 하나 내가 사귀다 헤어지고 나서 임신한 거 알았거나 알고 보니 그 남자가 쓰레기 같은 놈이었던 경우, 내가 엮이고 싶지 않고, 그 남자도 원하지 않은, 반은 ‘그 남자 애’이기도 한 거잖아.
그래, 내가 막말로 돈이 또 많으면 모르겠다, 낳아서 키우는 쪽으로 생각이 들지. 근데 아니잖아.
내 월급으로 나 하나 먹고살기도 겨우 바쁘고 가끔 마이너스될 때 있는데 집도 없이 월세 사는 내가, 생명의 소중함 챙긴다고 앞날을 안 생각하고 애 낳으면 나는 돈은 어떻게 벌고 걔는 누가 키우는데?
동생은 내가 사용한 ‘그 남자 애’라는 말에 격분했다.
-언니, 지금 ‘그 남자 애’라고 말했어요? 임신하면 언니 뱃속에서 자랄 아이인데 남의 애 말하듯 ‘그 남자 애’ 라구요?
누가 들으면 실제로 내가 임신이라도 하고 그걸 중단하고자 하는 사람이고 그녀는 실제 그런 나에 대한 비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내 입장에선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 단어의 잘못된 부분이 없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S의 생각을 잘 알겠고 그 친구의 생각도 전혀 틀린 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생명이라는 건, 만든 사람 반반 책임이고 사실 여자가 임신했다고 했을 때 책임지기 싫어 도망치는 남자도 꽤 있다.
안타깝게도 직접 봤다. 예전에 학습지 선생님 하면서 그래서 어머니가 된 분들을 많이 봤다. 시에서 협소하게나마 주거지원과 교육 분야의 지원이 되고 있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충분할 리 없었다. 그게 왜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무 책임 없이, 생물학적 어머니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피임을 철저히 하겠지만, 함께 할 사람이 아닌 경우, 만에 하나 임신하게 된 일이 생긴다면 나는 절대 낳지 않을 생각이라고, 내 생각은 변함이 없을 거라며 내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도 내가 이기적이고 잔인해 보인다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말로 포장하지 않았다.
둘 다 고집까지 약하지 않아서 이 주제를 결코 다른 이야기로 돌리지도 않고 계속 나는 내 입장을, 그녀는 그녀 입장을 계속해서 말하느라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먹을 거 앞에 두고 먹지도 않고 싸웠다. 그 때문에 피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얼굴도 상기돼서 붉어졌다.
이게 뭐라고.
결국 둘 다 만족할 만한 결론도 내지 못했고, 화해할 생각도 들지 않은 채로 대화가 중단됐다. 그대로 화가 나서 그녀와 나 모두 3-4분, 혹은 5분 가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도 서로 말없이 각자 알아서 마셨다. 아무 대화 없이 흘러가는 5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때 든 생각은 이랬다. 이런 걸로 싸우고 안 볼 사이가 될 줄 몰랐지만 이 동생과는 앞으로 볼 일 없겠구나.
그런데 그 동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언니.
내가 대답을 하자 동생이 말했다.
-우리 지금 이거, 싸운 거 아니에요. 아시죠? 언니가 지금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사실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그냥 오늘 우리가 뭐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이 참~ 다르다, 뭐 그런 걸 알게 된 그런 날인 거예요,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죠?
나는 이렇게까지 싸웠으니 오늘이 그녀와 보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고마웠다. 그렇게 각자의 입장이 결국 굽혀지지 않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먼저, 이건 싸움이 아니고 우리가 끝이 아닌 사이라고 말해준 것에 대해서.
나중에 좀 더 친해져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5번의 유산 끝에, 나이 마흔에 정말 힘들게 얻은 딸이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나이 때문에 떠밀리듯 결혼한 스물일곱에, 그것도 두 달 만에 임신하여, 아버지가 몇 달째 백수일 때 태어난 딸이었다. 비록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는 직장을 구하셨지만 어머니는 그 몇 달 동안 이웃한테 생활비를 빌려서 매달의 생계를 해결했다고,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애써 노력해서, 여러 번 실패 끝에 힘들게 얻은 외동딸로 소중하게 컸을 그녀의 어린 시절과, 가정이 어려울 때 태어나 어린 나이라 쳐도 엄마의 험난함을 여과 없이 보았고, 조금 커서는 주변으로부터 엄마의 고통을 들어가며 성장한 내가 가질 수 있는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이제는 그걸 알게 되었다. 아마 손을 놓았다면 알 수 없었을 서로의 입장이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계속 함께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먼저 내 손을 잡아준 게 컸다.
나는 생각이 달라서 힘들 것 같으면 안쓰러운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이 더 급선무라,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그 사람들을 놓아버리니까.
그렇게 뼛속까지 내려가서 싸우고도 우리는 가깝게 지낸다.
그럴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