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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Nov 07. 2019

내 편이 아닌 사람

그래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편 이야기를 하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지향하는 삶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10대나 20대 때는 솔직히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는 내가 결정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1. 결혼을 한다.

2. 아이를 낳는다.     


는 인생에 필수사항이라고 생각했다.


남녀를 막론하고.


평범하고 보편적 상황에 있다면 적절한 시기에 누구나 저 두 개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깨진 건 10년 전,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이었다.


학비는 모두 빚이 되어 있었고, 글 쓰는 것 말고는 두드러진 기술을 갖고 있는 못한 나로서는 무슨 일을 하든 전문직이 아니다 보니, 일을 구해도 그렇게 벌이가 시원치 못했다.      


지금이야 1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해보니 전문직이라고 하는 직종들도 결국,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하는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노동시간이 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당연히 좀 더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어쨌든 졸업 직후 작가라는 꿈을 가진 것과 별개로, 당장 매달 돌아오는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다. 그때 만났던 남자 친구에게 종종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아이를 아예 안 낳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꼭 낳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형편이 괜찮아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은 몰라도 내 계산상, 먹고 입는 데 걱정은 없이 살만큼은 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여유자금이 5000만 원 정도는 있을 때에나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나는 그렇다고.


그리고 예전엔 안 그랬는데 어느덧 나는 아이들보다 일이 더 좋아졌다.


이 마음이 자리 잡은 건 아무래도 학습지 교사를 2년 동안 하면서 아이들이란 존재와 육아의 실체를 짧게짧게지만 아주 가까이서 본 덕분이었다. 정말 온갖 변수를 다 본 것 같다. 그것도 아주 극히 일부겠지만.


15분-30분, 길면 1시간 학습시키는 동안에도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은 참 안 듣는다. 어머니들 말에 의하면 그나마 공부해야 한다고 간식 먹이고 뽀로로 보여주고 달래서 얌전해진 상태라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처음에는 아이들 모두 다 어쩔 줄 모르게 귀여웠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게 좋다. 멋모르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학습지 교사는 하루에 7 가정에서 10 가정을 방문한다. 그중 하루에 꼭 한두 명 정도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9명이 아무리 귀여워도 말 안 듣는 1명이 무섭기 시작하면 아이들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가 아는 존재, 즉 마냥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일과 관계된 상황에서 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울어본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 그 험하다는 콜센터에서 근무할 때도 운 적이 없다.


하지만 공부하기 싫다고 난폭을 부리며 연필을 부러뜨리고, 책을 찢고, 반말과 욕설을 하는 8세 아이를 마주하고 그 아이의 윽박과 폭력성에 놀라 울고 말았다. 안 울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방 밖에 그 아이의 부모님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들어와서도 그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매주 그 아이를 보러 가야 했다.


예전엔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는 애정이 있었고 일이지만 좀 설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출근할 할 때 어디까지나 학습을 시키는 보조자일뿐이다 하는 마인드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아닌 일에 대한 의무감으로 변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래야 했는지도 모르지만.



원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생기는 법인 것 같다.


어쨌든 그 2년 간의 학습지 교사 근무로 학자금을 다 갚았다.


그리고 아이 자체가 싫어졌고 아이를 돌보는 것도, 달래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돈을 버느라 선택한 직업으로 인해 20대 후반에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었다.


그래서 언젠가 그 마음이 돌아와서 내가 아이를 갖고 싶고, 그 사랑을 퍼부어주고 싶고, 그럴 경제적 여력도 있을 때 아이를 가져야 하고, 길러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결혼했다고, 무조건 낳기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인내심과 애정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난 일단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다 소진했다.


돈 없다고 한탄하는 아이 어머니들의 하소연도 내 생각에 힘을 보탰다. 선생님, 돈 없으면 웬만하면 아이 낳지 마세요. 해달라는 거 못 해줄 때마다, 그거 진짜 부모로서 못할 짓인 거 같아요, 하는. 집집마다 돌림노래 하듯 말하는.



하지만 그때 남자 친구의 입장은 달랐다.



사람이 어떻게 다 준비해 놓고 아이를 낳느냐며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그 친구의 주장은, 아이들은 다 자기 밥그릇은 갖고 태어나고 성장하면 다 밥벌이하고 자기 짝 찾고 살아진다, 는 것이다.


자기도 서른 넘도록 여자 친구 오래 못 사귀고 그래서 결혼 못할 줄 알았는데 결국 괜찮고 마음 따뜻한 여자 친구도 생기고 결혼도 할 수 있게 될 것 같은 걸 보니, 세상은 살 만한데 왜 겁부터 먹느냐고 말이다.           


사실 일단 내 기준에는 그 친구가 변변하지 않았다. 벌이는 도찐개찐이었으니 넘어가야겠다. 내가 더 벌었으면 그를 더 한심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 텐데 다 내가 못난 탓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외모만 보자면, 누가 봐도 내가 훨씬 아까웠다. 그 외모에 그 벌이로 다른 여자 만나기 웬만큼 쉽지 않을 테니, 아니 솔직히 불가능할 테니 헤어지기 싫다면 여자 친구 말에 무조건 다 맞장구쳐줄 거라는, 마음씀씀이는 괜찮을 거라는, 비논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좀 더 대화를 해본 결과 그 친구는      


연애=결혼

결혼하면 애 낳아야지, 애 낳으면 여자는 일 그만둬야지.

아기와 집안일=여자가 전담마크, 밥벌이= 남자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내가 들었던 그의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 단순히 외모 때문에 그전에 만났던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가 짧고 안 좋게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다양한 사례를 들어 논리정연하게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쓰다 보면 A4 용지 20장은 거뜬히 나올 것 같아서 패스하겠다.


그리고 저혈압인데 혈압 오를 거 같으니까 간략하게 압축하자면 그는 생각이 저열했다.      


나는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을 수 있고, 형편 안 좋으면 내가 피임하기를, 혹시나 좋지 않은 상황에 임신했다면, 그 임신 중단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낙태가 불법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부모, 형제 어느 누가 내 생각을 돌리게 하려고 한다 쳐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인연을 끊는다고 해도.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살고는 있지만, 엄마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나 역시 안 태어났어야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심리적인 이유도 있다. 살면서 행복한 적도 많긴 한데 그래도 굳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안 낳아졌어야 엄마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나도 상처 받는 일 없었을 테니 그게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더 이로울 거 같지만 그걸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 엄마도 나도,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는 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막 사그라지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아이들을 만났던 시기기도 했고, 유경험자인 아이들 어머니 얘기를 들어봐도 여건이 충분치 않다면 아이를 안 낳는 게 최선이라는 입장을, 그와의 대화 때마다 굽힐 수 없었다.      


그 친구는 그런 내 생각을 모질게 비난했다. 어떻게 감히 여자가 아이를 안 낳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어디가 잘못된 거 아닌지, 형편이 안 되면 주변에 어떻게든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는 게 맞는데, 그게 아니라 애를 안 낳거나 지울 거라는 생각부터 할 수가 있는지. 여자의 행복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인데 어떻게 '일을  하고 싶다고 아이를 안 낳겠다'라고 할 수 있는지.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사실 결혼까지 하기에는, 그 친구의 외모가 부끄러웠는데 가까이 지내보니 그 친구의 사고방식도 부끄러웠다.

     

굳이 아무도 안 만나고 있기에는 내 20대가 아까워서 만나고 있었고 아이는 나중에 낳든 안 낳든 결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비록 내가 아깝지만 만나고 있었던 건데 누굴 못 만나더라도, 결혼을 죽을 때까지 못 하더라도 이런 부끄럽고 안일한 사고를 하는 남자는 안 만나는 게, 이미 만났다면 헤어지는 게, 내 인생에 이득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쉬운 일인가. 마음 맞는 사람끼리 살아야지.


  

그 친구가 나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내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배경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다. 그 친구는 묻지 않았다.



내가 다 잘못했고, 내가 내 생각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 친구의 생각 자체가 인간적으로 싫어서 헤어진 게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또 그 친구의 그 태도도 싫었던 것 같다.



자신은 옳고, 나는 틀렸으니, 나보고 고치라고 다그치는.



하지만, 아이를 낳고 말고 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내가 인연을 다 끊더라도 고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도 예외일 수 없었다.



궤변은 계속 이어졌는데 너 혼자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면, (자기 어머니 말고) 나의 어머니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것도 내 기준에 안일해 보였다. ‘그 일’에 그 친구의 역할은 없었으니까.           



나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현명하고 똑똑한 분이긴 하지만, 육아에서만큼은 적절하지 않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갖고 계셔서 맡길 수 없는 분이기도 했고.



길게 쓴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어쨌든 양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고치라고 하는 사람은 내 편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가 마무리돼서 기승전 설리가 되긴 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설리 편 들어주려고, 그러려고 쓴 글이다.



설리가 행동하고 표현했던 그녀의 방식은 그녀가 존재하는, 양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노브라 건, 자신의 발언을 가감 없이 표현해야 하는 것이건 뭐건.



그리고 고백하자면 내 옛날이야기(아래 링크에 있는 글을  보면 도움이 된다.)속에 나오는 음주운전은 범죄가 아닌 개인의 습관일 뿐이라고 말한, 공공의 적 같은 그 새끼보다 이 남자를 만나고 있을 때가 훨씬 더 숨 막혔고 불쾌했고 불행했다. 공공의 적 새끼는 최소한 만나는 동안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던 부분도, 서로의 사고방식을 맞춰가려고 한 부분도 있었다. 다만 헤어지는 과정에서 진짜 모습을 본 것이 큰 상처가 됐지만.


지금 이야기에 나오는 이 남자는 내 존재 자체를,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리고 공공의 적보다, 눈을 똑바로 보고 상대방의 인생관을 하나하나 부정하는 인간이 심리적으로 사람을 훨씬 더 고통스럽게 한다.



다 지난 옛날이야기지만

https://brunch.co.kr/@ddocbok2/106



누군가에게 양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고치라고 하지 말자. 낯설어도, 좀 불편해도, 혹은 왜 저렇게 살까 이해가 안 되도,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말없이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자. 그 사람, 숨 좀 쉴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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