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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Dec 28. 2019

의사 전달의 중요성

맞기 싫다고, 하지 말라고 말해. 얘들아.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맞는 걸 상당히 싫어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초등학생 때는 매년 운이 좋게 아이들을 때리지 않는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던 것 같다. 특별히 스트레스받은 기억이 없다.


하지만 특정한 운이 죽을 때까지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중학생이 되자, 슬슬 때리는 선생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뺨을 때리는 선생님까지 등장했다.


사실, 담임 선생님만 때리지 않는 선생님이라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과목마다 선생님이 다르고, 각 선생님마다 성향이 다르다. 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교사가 있고, 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사가 있다. 그리고 둘은 절대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지 않는다.


그 말은 학생을 안 때리는 성향의 교사가, 때리는 성향의 교사가 학생을 때리고 있는 걸 본다고 해서 크게 제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타 과목 교사가 학생을 지도한다고 때렸다고 해서 담임교사가 당신이 뭔데 우리 반 학생을 때리냐고 따지는 교사는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간혹 학교가 주요 공간이며 학생이 주인공인 드라마에, 학생들의 판타지 충족을 위해 나올지 모르지만 현실에 없으니 그게 멋있어 보이는 거다.


둘은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만 몹시 다르며 서로의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크게 터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다. 나는 때리는 사람보다, 때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고 지나가는 존재가 있음으로써, 그 존재가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그 존재가 더 불쾌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은, 혼날 일이 생기면 안 보이는 곳에서 혼났으면 싶었다. 하지만, 사실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 한다면 그 폭력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도 아이러니다.


나는 정말이지 아이러니가 싫다.




어쨌든 나의 경우, 학생 지도를 위해 뺨을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교사가 내 담임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뺨을 맞은 적은 없었다. 맞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으나 맞지 않았다. 내가 운이 좋아서라기보다, 내가 영악했고 치밀했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한 반 친구들 몇 명이 혼났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손바닥을 내밀라고 했는지, 칠판을 잡으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날은 뺨을 때리는 날은 아니었는지 때리기 위해 우리에게 뭔가를 시켰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싫습니다.


선생님도, 이미 맞은 친구들도 어이없어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사실 혼나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맞아본 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이 선생님한테 맞았을 때, 내가 판단할 때 맞을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지만 맞았다. 하지만 내가 왜 맞아야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맞을 만한 일이 아니면 맞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날, 맞을 정도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 행동이, 그녀를 열 받게 해서 뺨을 맞지나 않을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예상하고 준비해둔 게 있었다.


그전에, 내 마음속 밑바닥에 있는 솔직하고 노골적인 마음을 밝혀두자면 이것이다.


내 신체를 형성하는 데 조금도 일조하지 않은 누군가가 당당히 내 신체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불쾌하다.’ 그게 실제 내 신체에는 아주 큰 고통이나 상처가 되지 않더라도.




어렸을 때 아빠나 엄마로부터 매로 몇 번 맞은 적이 있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에 유달리 반항이 심했고 고집을 꺾지 않았기에 버릇을 고치시겠다고 그렇게 지도하셨다.


그로부터 십몇년이 지난 십 대 후반의 어느 겨울, 폭풍 사춘기의 날, 폭풍 반항을 하던 중이었다. 나 스스로도 이건 심하게 반항하는 것 같다 싶기도 한데 그 감정의 소용돌이가 멈추질 않았다. 그런 내 반항에 기가 차고 분에 못 이긴 아빠가 매, 어딨냐 라고 한마디 말했다. 그러자 나는, 때리는 순간 밖에 나가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맞기 싫으니 때리지 마시라고 말했다. 갑자기 돌변해서 침착하게. 때리는 순간, 안 보고 살 각오하고 때리셔야 할 거라고, 차갑게 말하는 딸을, 그래, 나가 죽어라! 죽을 때까지 보지 말자! 하고 때릴 수 있는, 정상적인 부모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상적인 딸이었냐고 물으면 자신이 없다. 어쨌든 그다음부터 체벌은 절대 없었다. 그 전에도 그리 많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맞을 만할 정도의 상황에, 그것도 나의 신체가 있도록 해 준 존재인 부모님이 때리려는 상황에도 불쾌했으니 선생님이 때리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낯선 학생을 본 교사는 불쾌해하며 나에게, 그럼 어쩌라는 거냐고 물었다.


-똑같은 이유로 다른 아이들은 다 맞았는데 너만 맞기 싫다고, 안 맞는다는 게 말이 돼?


지금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무슨 상황에선지 학생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결과적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사실, 내 계획은 그 학생 때처럼 뺨을 때리길 바랐다. 그것도 여러 차례. 절대 한 대로 그치지 않고, 이성을 잃고 분을 못 이겨 여러 차례 때리도록, 열 받게 할 말도 몇 마디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건 단순히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려는 목적에서의 체벌이 아닌, 범죄의 범주로 들어가는 폭력이 될 것이고 그때, 이런 손찌검이 처음이 아니라고 신고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공무원인 그녀를 법으로 처벌받게 해주고 싶었다. 그게 나의 빅 픽쳐였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이 그렇듯,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그럼 넌 어쩌고 싶다는 거야. 말을 해봐.


맞기 싫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때려야 하는데 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물러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우리는 서로 팽팽하게 맞섰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럼 어떻게 하고 싶냐고 나를 추궁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식은땀이 났는지, 얼마나 떨었는지 나만 알 것이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었으니 내가 대안을 제시해야 했다. 같이 기싸움을 하는데, 나는 속으로 떨면서, 그리고 별도로 내가 받을 적합한 수준의 벌까지 생각해내야 했다.


-다른 페널티를 주세요. 벌을 세우시던가 화장실 청소나 아니면 주번을 일주일간 시키시든지요.

-... 너는 수행평가 점수 빵점이야. 뭘 해도 안 채워줄 거야.


글로 쓰고 보니 상황과 분위기상 내가 굉장히 당당하게 말했을 거라고 오해할 것 같다.  정확히 밝히자면, 빅 픽쳐를 상상하는 것에만 재능이 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전하고자 하는 건 정확하게 하려고 했고, 이제 와 밝히자면 그 상황을 위해 방에서 몰래 연습도 했다.


실제 상황에선 연습 때보다 쭈뼛쭈뼛,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쭈그러드는 같았고 상상 속 내 모습보다 훨씬 소심하게 말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다 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 앞을 벗어나자 친구들이 말했다. 뭘 해서 0점인 수행평가 점수를 채울 거냐고, 차라리 맞는 게 낫지 왜 그랬냐고 말이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선생님이 내가 수행평가 점수 페널티를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녀 생각엔, 다른 학생들처럼 나도 수행평가 점수에 매달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입장에선 사실, 수행평가 0점이 페널티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내가 20대 후반, 늦어도 30대 초반에는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깟 수행평가 0점이 내 커리어에 무슨 상관이야,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성적 괜찮은 친구들이나 수행평가 1-2점에 인생이 갈리지, 나처럼 정말 성적 어중간한 학생이 안달복달한다고 수행평가 성적 때문에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갈리지는 않는다는 걸, 비록 공부는 못했으나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며칠 전 닭강정 30인분 배달 폭력 사건 기사를 읽었다. 피해자가 신고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해가 된다. 학창 시절, 학교에 신고를 하면, 선생님들이라는 사람들은 피해자에게는 니가 예민해서 그런 거다, 친구끼리 잘 지내라, 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해주고 가해자에게는 친구끼리 잘 지내야지, 하고 달래서 내부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굴었을 것이다. 이 일을 문제,라고 판단하게 되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생기게 되고, 그건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에 이 일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것이다.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피해자는 도움을 청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스스로를 위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졸업하면 이 괴롭힘의 고리가 끊어질 거야.


그렇게 일정 기간만 참으면 되는 거라 생각하고 참았을 것이다.


사실, 가해자 입장에서는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남들 에게 들키면 괴롭힘이고, 피해자 입장에선 죽을 만큼 고통이어도, 자기 입장에서는 ‘친구끼리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도 했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싶은 것이다.


가해자에겐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그들은 사실 말이 안 통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똑똑한 존재들이다. 처벌이랍시고 하는 의무적 사회 봉사 명령, 사실 난 이런 거 별 의미 없다고 본다. 겉으로야 하겠지만 속으로 반성하기보다, 아씨 좆 됐네, 다음엔 좀 조심해야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게 옳지 않다.’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가장 최초의 괴롭힘 때부터 알고 한 행동들이다. 똑똑해서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쾌감을 위해 나쁜 쪽으로, 매우 똑똑하고 뛰어나다. 다만 이미 누군가를 통제함으로써 느끼는 권력적 쾌감, 그 카타르시스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걸 계속해서 느끼기 위해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나쁜 놈들은 나쁜 쪽으로 똑똑하면서 말은 안 통해서.




시나리오를 쓸 때도, 회사원이 되어 업무를 위해 단순한 글을 쓸 때도 가장 중요한 건 똑같다.


어떤 내용을 말하고 싶은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게 의사를 잘 전달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다.


그리고 난 솔직히 형량의 무게가 가해자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반성한다고 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걸 보면.


가해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정확한 타이밍에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반성의 눈물도 흘릴 줄 아는 똑똑한 아이들이다.


그냥 넘어가기 싫은 문제지만, 우선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피해자가 느끼기엔 분명히 괴롭힘인데, 가해를 한 당사자, 혹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이게 무슨 괴롭힘이야?’ 싶은 상황. 누구한테 말하기가 애매한 그런 상황이 있다. 내가 예민한 건가 싶은, 그리고 나만 일정 기간 참으면 끝날 거 같다 싶은 그런 상황.


한 번이면 모르지만, 그 참아야 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건 괴롭힘이 맞다.


사실, 최초의 한 번부터 마음속에서는 이건 괴롭히는 게 맞다는 내면의 소리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혹시 내가 예민한 건가, 해서 넘어갔을 것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끝이겠지 하고 넘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게 범죄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 애매하면, 열 받게 해서 몇 대 맞을 각오 하고 들이받았으면 좋겠다.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내 실패한 빅 픽처처럼 흘러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몇 대 맞고 그 사람의 폭력성을 까발려서 범죄자로 만들어버려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망할 소년법 때문에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똑같은 범죄라고 해도 성인이 받는 정도의 처벌은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서 실형을 선고받게 해서 범죄자로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우선 스스로의 힘으로 가해자에게 예비 범죄자 프레임이라도 씌워뒀으면 좋겠다. 나조차도 비록 실패했지만 그렇게 법적인 반격을 되돌려주는 게 스스로에게 가장 치유와 위로가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더 이상 괴롭히진 못 할 것이다.


미안하게도, 내가 하는 지금 얘기가 모두에게는 정답이 아닌 걸 안다.


하지만 사실 정답이라고 해도, 아주 철저히 계획한다고 그게 다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진 말았으면 좋겠다. 어떤 악조건이 그냥 저절로 좋아지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주는 어떠한 히어로나 만병통치의 시스템도 사실 세상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해주는 수밖에 없다.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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