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고구마게시판 속 한줄기 사이다
오늘 네이트판에 들어갔다.
그곳에도 브런치만큼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그중엔 익명의 고민상담글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타인을 위해, 아주 적극적인 문제 해결 의지를 보여주는 댓글을 써주는 이들도 많다.
나는 오지랖이, 그 최초의 목적이 선의를 갖고 있던 말던 듣는 사람에게 대부분 안 좋은 효과를 발휘하며,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오지랖의 순효과가 발휘되는 것 같다.
많은 익명의 글 중에, 자신이 둘째 딸로 태어나서 차별을 많이 받고 자라다가 지금은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첫째 딸을 낳고 잘 살고 있다고 시작하며 쓴 글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둘째를 임신했는데, 딸이라서 걱정스럽다고 하는 글이었다.
첫째인 언니와 셋째지만 장남인 남동생 사이에서 치여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서 서러웠던 만큼 둘째를 딸로 낳지 않고 싶다 생각했는데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자신도 슬프다고 했다. 아이가 받을 속상함을 생각하니 미안하면서도 아이가 딸인 게 슬프다고 했다. 그 와중에 시부모님까지 둘째도 딸이면 어떻게 하냐고 가벼운 책망을 해서 이제 19주 밖에 안 된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 살까 봐 걱정된다고 아들이 아니어서 속상하다고 글이 끝났다.
지금 2020년인데.
1980년대 정도라도 이해할까 말까인데, 2020년인데,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서 슬프다는 생각을 하는, 나와 같은 성별의 존재가 있다는 게 슬프다. 그리고 화가 난다.
딸이 뭘 어쨌다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두고 딸이라서 슬퍼하기까지 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에 무슨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다행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니 슬프고 짜증 나네요'라고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베스트 댓글은 아니었지만 댓글 아래쪽에 내려가니 자신도 두 딸을 낳았는데, 시부모님께 첫째를 임신하고 딸인 걸 알려드리자 자신에게 이런 말을 시전 했다고 한다.
-에휴, 그래도 첫째는 아들을 낳아야 부담을 안 갖지.
그 댓글러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머니, 제가 부담을 가져야 하나요? 왜죠?
아, 한줄기 사이다. 이런 고구마 같은 글 끝에 매달린 수많은 사이다 중에 내 취향에 딱 맞는 사이다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좋은 친구를 알게 되는 것만큼이나 행운이다. 사실, 단순히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뭔가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양육 지원금이나 바우처를 더 준다거나 주택 분양, 세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세상 분위기가 아들, 아들하고 구는 바람에 아들이 많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는 여성에 비해 남성이 너무 많다. 그래도 만날 남자들은 여자를 잘 만나겠지만, 남성들이 여성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확 낮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여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만날 남자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아서 남자들보다 이성을 만날 기회의 수는 많다고 할 수 있는데도 별로 이성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도 꽤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가뜩이나 적은데 그런 성향의 여성들을 제외하면, 남자들이 만날 수 있는 여성의 수는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망할 성비의 세상, 더럽고 치사해서 여자 따위 안 만나!' 하면 다행인데, 만나고 싶어 하면 그 노력은 태어난 자의 몫이다. 낳았다고 해서 부모님들이 대신 노력해줄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부모님의 안목은 우리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뭐 이런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은 빅데이터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정보전달 같은 걸 하려던 건 아니다.
저 문장이 너무 좋았다. 제가 부담을 가져야 하나요?라는 문장.
첫째는 아들이어야 부담을 안 갖는다, 고 주입하려는 높은 서열과 낡은 사고방식의 시부모님 앞에서,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그들 말대로 첫째를 아들로 낳으면 어떤 점이 부담을 안 갖는 것인지, 무슨 부담을 가지라는 것인지 자기 주도적 합리적 의심부터 하는 냉철함.
어른들 말이라고 무조건 동의하지는 않고 왜죠?라는 단 두 글자로 증거를 제시해달라고 말하는 침착하고 세련된 모습.
저 문장, 저 태도 마음속에 저장했다가 쓸데없는 소리 하는 사람 있으면 바꿔서 꼭 써먹어야지.
제가 ~해야 하나요? 왜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