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기

상황파악능력

by 시은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면서 느낀 게 있다.


나는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와 피아노에 재능이 없구나.


그럼에도 학원에 꾸준히 다니면서 어쨌거나 체르니 100번을 다 떼고 나온 것은 아빠의 로망 같은 거였다. 거실에 피아노가 있고 내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는 가족의 풍경이 아빠의 가족 판타지였다.


이게 그리 엄청나게 불가능한 소망도 아니었는데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놓인 적도 없다.


내가 치기 싫었으니까. 죽도록 싫은 건 아니었고 가끔은 내 피아노 선율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까지 치고 싶을 정도로 좋은 건 아니었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들을 때면 좋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가 연주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엄청 아름답다고 느낄 만큼 내가 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아마 거의 처음 치자마자 느꼈던 거 같긴 한데 피아노를 칠 때마다 점점 뚜렷이 느낀 깨달음은 아, 나는 이 일에 재능이 없구나, 였다.


1,2년 뒤에는 미술 학원을 다녔는데 어라, 이건 좀 괜찮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재미도 있고 하나의 사물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도 어린 시절의 나를 노력하게 한 동력이었다.


하지만, 또 다시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이걸로 뭔가 내가 대단한 걸 표현할 수 있거나 직업으로 가질 정도의 재능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앞에 말한 것처럼 말 그대로 어느 정도의 재능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깨달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착착 접어졌다. 슬픈데도 그걸 알 수 있었다.


애정이나 흥미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아, 이건 내가 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가끔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그림으로 칭찬을 받을 때조차 사실은 그래봤자 현실 속에 내던져 졌을 때는 그게 그리 대단한 재능이 아닌 것도 알 수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를 포기하고 나자 요즘 다시 책이 잘 읽어진다. 재미있고 느긋하게 푹 빠져서 읽는 게 느껴진다.


서울에 와서 전전긍긍하느라 푹 빠져서 즐기듯 책을 읽는 게 불가능했다. 많이 읽었지만 읽어야 해서 읽느라 이 책에서 내가 뭘 배울 수 있을까 뭘 얻을 수 있을까, 하며 포식자가 잡아먹을 걸 찾듯이 읽었다. 뭐라도 건질 거야, 라는 생각으로.


빨리 성공해야지, 하는 마음에 행동은 안 그래보여도 조급해서 책 읽는 마음까지 평소 갖고 있던 마음을 닮아갔다.


남들보다 늦게 밥벌이를 시작했으니까, 꿈에 도전하기에 아주 빠른 시작도 아니었고, 부모님 도움을 안 받겠다고 친구들의 도움을 너무 많이 받으며 시작했었기 때문에.


언제든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맨날 책 읽는 게 너무 좋은 이 상황은 좀 더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잃을 때 잃더라도 가졌을 때 안 누리는 멍청한 짓은 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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