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없고 다행스럽게
청순한 양아치 라는 제목 글에서 비폭력적으로 삥을 뜯긴 적이 있다고 쓴 적이 있다.
-너, 돈 좀 있니?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말이 나에게서 돈을 갈취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일단 왜 돈이 필요한지 물어봤다.
-왜?
-노래방 가려고.
아, 얘네들이 노래방이 ‘진짜’ 가고 싶은데 돈이 없구나. 그래서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까지 돈을 빌리려는구나 싶었다.
큰 돈도 아니었고 나는 선선히 빌려줬다. 집이 부유하진 않지만 돈 몇천원 빌려준다고 삶에 고난이 있을 것도 없었다. 쟤네들도 진짜 놀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당장 놀고 싶거나 그 돈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당장 놀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일이 쟤들 중 누군가에게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자주 묻는 것도 아니었고, 없으면 없다고 했다. 그럼 또 걔네들도 더 묻지 않았다.
또 어느날 돈이 있냐고 또 물었다. 나는 있나 없나 잘 모르겠어서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그 일행 중에 유치원 동창이 있었다. 원래 있던 애였는데 그날은 갑자기 걔가 빽 소리쳤다.
-야! 너 돈 있다고 하지마, 이제.
하더니 같이 있던 친구들을 데리고 방향을 바꿔서 가버렸다. 앞으로 쟤한테 돈 있는지 묻지마.
아주 오래 지나고 보니 그게 삥 뜯는 상황이었구나, 깨달았다. 너무 지났긴 하지만. 그 유치원 동창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친구여서 나중에 그 친구가 날 되게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걔는 어릴때도 눈물 많고 밥 안 먹더니 지금도 되게 약한 거 같다고 했다고 한다.
일진이면서 감수성 뛰어나기는. 그 친구가 키가 170cm로 큰 편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작고 가엾어보였나 보다.
무서워서 돈 준 거 전혀 아니었는데. 그 친구 눈에는 조그만 것에도 겁에 질려 잘 울던 유치원 시절의 내가 보였나 보다.
그런데 요즘 일진들은 내 동창 같진 않은 거 같다. 진짜 죽자고 때리고, 셔틀 시키는 거 보면 약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조용히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것도 다행스러운 일인 거 같다. 다행인 줄도 모르고 지나갔지만.
가끔 위험한 순간이 위험한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다행스럽게 눈치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