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가, 그 꿈을 깔끔하게 포기한 이유가 되었다.
연휴라서 너무 좋다.
쉬고 쉬고 또 쉬다 보니, 작년 초가 떠올랐다. 그 당시 입사했던 회사의 인간관계를 버티지 못하고 2달 만에 그만두었을 때, 그때 나는 정말 지쳐 있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한 노력도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작가의 꿈을 그만둔다’는 선택지 자체가, 내 인생에 없었다.
그때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이 떠올랐다.
<왕가네 식구들>에서 왕봉과 이앙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해서, 전셋집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였다.
첫째인 수박(오현경)이는 돈 쓰는 것만 좋아하는 외모만 뛰어난 인물이었고, 셋째 광박(이윤지)이는 작가라는 꿈을 이루겠다고, 교사라는 직업을 갑작스레 때려치우고 백수가 되어 글이나 쓰고 있을 때, 집안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한 것은, 친정과 시집에서 각각 치이면서도, 거의 매일 쉬지 않고 등산복 매장에서 근무하며, 오롯이 밥벌이를 해낸, 유일하게 ‘생업인’이었던 둘째 호박(이태란)이었다.
심지어, 이 세 명 중에 왕호박만 대학을 못 갔다. 호박이 대학을 가야 할 시기에 수박, 호박, 왕돈(호박보다 어리지만, 촌수로 그녀의 삼촌) 중에 1명은 대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가족들은 수박은 첫째이고, 왕돈은 남자이므로 호박에게 포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인기 절정이었던 이 드라마를 다시금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가 하고 싶다고 직장을 때려치우는 광박(이윤지)이가 결코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극 중에서 이기적이고 못됐고 허영심 많은 수박이 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광박이가 더 짜증 나고 한심했다. 그리고 맨날 여기저기 구박만 받았지만, 생업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금전적인 해결을 하는 호박이가 제일 근사했다. 정말 너무너무 근사했다. 저 상황 속 그녀의 ‘능력’은 신데렐라 판타지 드라마 속 재벌남들보다 몇백 배 뛰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글이 뭔지도 모르고, 작가가 뭔지 모른다고 해도, 살아오면서 가족에게 위로보다 상처만 받았으면서도, 위기상황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호박이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외 인물은 ‘자기 성격(혹은 성깔)’ 만 있다 뿐 위기 앞에서 누군가를,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건사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작가가 못 되었고, 호박이처럼 가족까지 건사는 못 아니지만, 내 인생을 내가 건사할 수 있는 인간이 된 내가 충분히 괜찮은 것 같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건사’ 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작가가 되는 것, 그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소중했지만 결국 못 이룬 것, 그래서 포기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했던 인생의 경로는 표면적으로 내가 한심해하는 광박이와 흡사해 보인다.
극 중에서 광박이가 29살에 작가가 되겠다고 교사를 그만둔 것으로 나오는데, 나 역시 29살에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작가가 되겠다고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포기한 것은 정말 정말 안정적인, 육아휴직과 정년이 보장되는 아주 괜찮은 직업, 즉 스스로를 건사하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직업군이었고, 내가 포기한 것은 학습지 선생님이라는 3D 업종 중의 하나인 직업군이었다.
내가 학습지 선생님을 그만둔 것은 29살, 20대의 마지막 순간에 더 늦기 전에 작가의 꿈에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게 가장 지분이 높지만, 노동 강도에 비해 너무너무 불안정한 급여도 한몫했다. 진짜 무슨 일을 해도 이 일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렇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공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고생해서 성공하면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컸다.
학습지 교사는 자신이 맡아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그 과목 수에 따라서 그 수수료가 월급이다.
어떤 달에 학생들이 확 줄면, 그 높지도 않은 월급이, 전의 달과 비교해서 4-50만 원 가까이 낮아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종종 최저시급에도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의 월급일 때도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싶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학습지 선생님들은 최저시급에 관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개인사업자들이었다.
입사 당시에 설명을 듣기로, 학생들을 배정해 주면, 그에 따라 떨어지는 수업 수수료가 150~170만원 정도 되는데, 학생과 과목 수를 차차 늘려나가면 1,2년 차 정도 즈음엔 250~300만 원 정도의 안정적인 수수료를 받아갈 수 있다고 설명받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선생님들은 인기가 많아서 학생수도 금방 늘 거라고도 했다.
학습지 회사에 입사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좋은 부분만 강조했는데 사회초년생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직원으로 소속된 게 아니라, 그 회사와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로 구분된다는 설명은 들었다. 하지만 그게 최저시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설명은 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 월급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계약서에 나온 대로 수수료에 따라 받는다는 말대로라면, 잘못된 것은 없었다.
간혹 학생 수가 늘거나 과목을 늘려서 조금 늘 때는 5-10만 원 오를 때도 있긴 했다. 어쨌든 고정적인 급여라는 게 없으니 고정적으로 저축을 할 수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말일까지는 학부모님들이 학습지 비를 내주셔야 하는데 그걸 까먹고 지불하지 않으면, 정산을 위해 그 비용을 일단 교사가 내야 했다. 안 낸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다섯 가구에서 돈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 한 과목당 35000원 정도인데 보통 2과목 정도 한다 치면, 35만 원 정도를 내 카드로 긁어야 한다. 물론 나중에 받기는 받는다. 하지만, 나갈 때는 30만 원 이상 뭉텅이 돈이 나갔는데 받을 때는, 3.5~7만 원 단위로 받게 되니 아무래도 그 돈이 푼돈처럼 여겨져서 물 흐르듯 새어 나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학생들이 쉽게 그만뒀고 아이들의 수 자체가 매해 계속해서 줄고 있어서 시장 자체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10년, 20년을 고생한다 해도 성공 따윈 마른하늘에 벼락이 쳐도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게 확실했다. 30년을 일한다 해도 퇴직금 따윈 없이 그냥 거기서 끝인 직업군이었다.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오래 해도 그만두는 날로 퇴직금도 없이 소득 종료인 일을, 누가 오래 하고 싶겠는가.
말이 길어졌는데, 여하튼 내가 그 직장을 그만둔 것은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수입의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가 규칙적인 수입의 직업군은 아니지만, 상업영화 시나리오 한 편이 완성되고, 그게 팔린다고 가정하면, 어쨌든 월급쟁이들의 일 년 연봉보다 좀 더 높은 원고료를 받는다. 물론 그 바닥에서 입지가 잡힌 작가라는 가정 하에 가능한 얘기지만 말이다.
매달 학자금을 갚기 위해선 당장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해서 들어갔고, 직접 겪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수입구조인 것을 알게 됐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괜찮았다. 그래, 이왕 들어온 거 학자금은 다 갚자 해서 2년간 그 일을 하며 남은 학자금을 다 갚았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2년 동안, 언젠가 내 시간과 내 노력을 작가라는 꿈에 대해 좀 더 쏟아부어 진짜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퇴근 후, 혹은 주말마다 메모해 놓은 글들을 꿰어서 이어나가며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쓰려고 했던 건, 긴 호흡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도 있었지만 그때의 소득이 너무 불안정해서 그랬던 것도 있었다. 글 쓰는 것, 이게 내 직업이고, 소득이 안정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80세가 넘어도 지겹지 않게 이 일을, 주 6일 하래도 할 자신이 있었다.
김칫국이지만 실력과 운이 모두 따라준다면, 청룡영화제 같은 데서 상도 받게 될 거라는 환상도 없진 않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즐거움도 물론 컸지만, 그보다도 정말이지 안정된 수입을 갖고 싶었다. 월급쟁이들의 일 년 연봉보다 좀 더 높은 원고료라는 수입, 그거.
작년 초, 작가 지망생 노릇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면서, 그만둔다는 선택에 후회가 없는지, 나중에 다시 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어보았다. 내 대답은, YES 였다.
작가가 되기 위해 독립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인 소득으로 스스로 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이루게 해 줄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직장 생활로 ‘안정적인 소득으로 내 삶을 꾸려나간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사실 월급쟁이들 다 그렇기는 하지만, 매달 겨우 꾸려나가는 것 같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돈이 든다.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작업에 더 무게를 두는 삶을 살았다면, 그래서 글에 집중하느라 직장을 다니기보다,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면,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건사하는 것, 나에게 그것만큼 근사한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