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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의 세계

-넌 인류 걱정은 안 하니?

by 시은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오래 전에 당했던 가스라이팅 몇 개가 떠오른다. 앞의 글에서 예전 남자친구가 가스라이팅 하나 만큼은 잘 한다고 했었는데 그의 가스라이팅의 스케일이 너무 크고 방식 또한 참신해서 생각할 때마다 불쾌함보다는 그의 크리에이티브함에 웃음부터 난다.




그와 만나던 당시, 무슨 이야기 중에 내가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다면 아이를 낳지 않거나 경제적 기반 잡히고 자리 잡히고 아주 늦게 낳을 생각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는 전세계적으로 저출산인데 인류 걱정도 안 되니?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인류 걱정이라고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당시 학자금도 다 갚지 못해서 꿈에 제대로 도전을 할 여력이 없어서 고민하는 28세의 내가, 전세계적으로 저출산인 걸 걱정해서 출산률 높이려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뜻인가? 내 앞가림도 못 하는데? 부모님한테 나중에 용돈은 드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인류 걱정을 하라고?


인류 저출산은 각국의 정상들도 해결 못하는 일인데, 그 똑똑한 사람들도 온갖 정책으로도 해결 못한 일을 내가 뭐라고 해결할 거라고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혼란스럽고 어이가 없었지만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 그리고 내 남자친구라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충분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면 상대방도 내 입장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를 충분히 설명하면 이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50세가 넘도록 믿기도 하던데, 나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게 절대 불가능할 수 있다는 걸 이 남자 덕분에 29세가 되기 전에 깨달았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몰랐으므로 생각을 최대한 조리있게 정리해서 말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성심성의껏, 이해하기 쉽게,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저출산 극복을 위해서 여자들이 다 지금 학업, 일, 다 미뤄주고 출산 걱정 해야 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 않냐, 다들 삶의 중요도가 다르고, 우선순위를 해결해가다가 결혼이 하고 싶으면 하는 하고, 아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되고, 갖고 싶은 사람들이 낳는 거지, 무작정 생물학적으로 건강하다는 이유만으로 20대 후반, 30대 초반 여성들이 애를 낳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무직정 임신, 출산하고 엄마라는 정체성도 갖지 못한 여자들이 그저 생물학적 엄마이기만 하면 그건 학대로도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라고 말을 하는데, 그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여자가 모성애가 없다는 게 말이 안돼. 그리고 너는 아프리카 여성들을 생각하면 이 땅에 사는 여자들이 누리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아? TV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어린 엄마들이 자기 아기 살리게 도와달라고 우는 거 본 적 없어?


순간, 여기서 왜 아프리카 여성들이 나오는 거지 싶긴 했지만, 그래, 뭐 굳이 비교를 하자면, 내가 그 여성들의 삶에

비하면 많이 누리고 있는 건 맞지. 데이트랍시고 만나서는 싸우고 집에 가고 싶진 않았으므로 훈훈하게 마무리 지어보려고 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들보다 많이 누리는 내가 이런 생각하는 거 이기적일 수 있겠다. 빠듯하고 힘들겠지만 내가 아프리카 여성들을 위한 NGO 알아보고 매달 얼마라도 후원할게.


라고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는데, 그가 어이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아프리카 여성을 도우라는 얘기가 아니잖아.

-그 사람들이 나보다 열악한 환경인 건 맞고, 그렇다고 내가 지금 놓인 삶을 다때려치우고 거기 자원봉사하러 아프리카 오지 같은 데 갈 순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돕겠다는 건데 그럼 어쩌라는 건데?

-그 사람들에 비하면 행복하고 괜찮은 환경이니까 알아서 빨리 결혼하고 애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하라고. 그게 여자의 당연한 행복인데, 결혼도 안 하고 싶어하고 애도 안 낳고 싶어하고. 니가 그걸 하고 싶다고 생각하도록 내가 꼭 이렇게 비교하고 줄줄이 설명을 해줘야 그런 생각을 할 거니?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오빠,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당시엔 ‘가스라이팅’이란 정확한 단어가 널리 통용되지 않았을 때라 저 상황을 표현할 가장 유사한 단어라곤 내 빈곤한 언어로는 ‘개소리’가 제일 근접하다고 생각했다. 나름 조신하고 공격적이지 않게 말하려고는 했지만 저 단어를 안 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공격적으로 받아쳤다.


-개소리? 야, 너 미쳤냐? 그게 여자애가 할 말이야?


여자애가 할 말. 여기서는 나도 좀 흥분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빠, 진짜 내가 왠만하면 받아주고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데... 남자가 할 말, 여자가 할 수 있는 말 가르는 건 진짜 너무 후져. 생각만 해도 후질 것 같은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후진 건지 오빠는 진짜 상상도 못 할 거야. 나 지금 소름 돋은 거 같아...


이날의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내가 사과를 했을 것이다. 미안, 이라는 소리를 안 하면 더 많은 량의, 그것도 정말 어쩜 이런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나 싶은 참신한 가스라이팅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흘려들어도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무슨 말이든 하고싶어 이러나 싶은 건가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여자친구인 내가 아니면 이 헛소리 누가 받아줄까 싶기도 하고 듣다 보면 허무맹랑한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재미있기도 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던데 나에 대한 그의 가스라이팅을 듣다 보면, 천일야화 속 왕이 된 것처럼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지겨운 세헤라자데 같으니. 그러다 해도해도 너무 끝이 안 나서 그의 얘기를 그만 들으려고 ‘오빠, 그만. 다 이해했어. 미안.’ 이라고 말하면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거봐, 오빠 말이 다 맞지? 이렇게 오빠 말 잘 들을 거면서. 듣다 보니까 이해됐지? 오빠가 설명을 잘 하는 건지, 니가 똑똑한 건지. 어우, 귀여워. 근데 표정 왜 안 좋아?


그 길고 긴 가스라이팅 끝에 그가 하는 칭찬이 있었다.


그래도 너는 다른 여자들이랑 진짜 다른 것 같아. 다른 여자애들은 내 말에 끝까지 반박하고 싸우고 절대 나한테 사과 안 하던데. 나보고 생각 고치라 그러고.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세상에서 니가 제일 착한 것 같아.


내 앞에 보살들이 지나갔구나, 이런 사람을 고쳐 보려고 했다니. 내가 너랑 절대 안 싸우는 건 언제 상황 봐서 헤어질 거라서 에너지 낭비하기 싫어서 그런 건데.


쓰고 보니 더 웃기군. 이거 말고도 많다.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안주 따윈 필요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가 나왔다. 가끔 글 쓰는 언니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만 더 길게 만나보지 그랬냐고 항상 안타까워한다. 이렇게 신박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남자는 만날 땐 힘들지만, 글로 쓰기에 좋은 남자라고 말이다. 분명 더 많은 이야기 소재가 나올 남자였다고.


이 정도로 충분해요. 소재 소스 뽑으려다 제 명줄 짧아질 뻔 했어요,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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