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보다 스물에
“어차피 깨질 환상이라면 마흔에 깨지는 것보다 스물에 깨지는 게 낫다.”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Zelda sayre Fitzgerald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ay3nM-A3sMEiG28mPIf6f2ff50ZiIr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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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세계 2화 오프닝은 환상이 깨어진 지선우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황폐해진 내면을 위선과 기만으로 감춰야만 하는 이 비루함. 이게 바로 지옥이었구나,라고. 드라마 속 지선우 나이는 대략 마흔쯤이었다.
스물과 마흔 사이. 나는 스물아홉에 사랑에 대한 환상, 더 나아가 운명적인 사랑의 환상까지 깰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감정이 너덜너덜해져서, 내가 몹시 불행한 줄 알았는데 행운까지는 아니었어도 환상이 깨지는 시기로서는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스물은 환상이 깨지기에 너무 여리고 어린 나이 같고, 마흔에 깨지는 것은 좀 늦은 감이 있는 것 같다. 서른 즈음에 환상이 깨진 건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준 남자 친구는 내가 너한테 무슨 죽을죄를 졌니?라는 말버릇이 있었다.
그 남자 친구는, 그가 미안해야 할 상황에서 사과하지 않아서 ‘오빠는 이게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라고 물어보게 만들었고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까지 사과해야 해?
-내가 무슨 죽을죄를 졌니? 사과까지 해야 해?
정말 누가 봐도 분명히 미안해해야 할 일 앞에서도 그는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너무 답답한 마음에 그냥 ‘미안하다고 해주면 안 되느냐’ 고 한 적도 있었다. 이런 걸 부탁씩이나 하다니,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다르게 착하면서도 답답한 인간이었다.
‘이게 죽을 죄라도 돼?’
그가 사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일이 죽을죄, 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자신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나를 때리거나 욕을 한 것도 아니니 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죽을죄도 아닌데 꼭 사과를 받아야겠냐고.
지금 이 글을 그가 볼 일도 없고 만날 당시에도 여러 번 말했을 때도 안 들어 처먹었지만 그냥 한번 써본다. 상대방이 불쾌해하는 일이면 사과를 하는 게 맞고 ‘죽을죄’라는 건 그에 따른 합당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고, 사실 ‘죽을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은 살인, 강간, 강도, 폭력, 테러 정도 급의 일이고 그건 사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미친놈이나 죽을죄 앞에서 사과 타령하는 거다. 죽을죄는 처벌이 맞는 거고. 내가 미친놈을 만난 걸까?
가스라이팅에도 재능의 영역이 있는 것일까. 다른 건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가스라이팅만 그렇게 잘하다니.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량의 가스라이팅일 것이다. 그 당시엔 가스라이팅이란 단어조차 몰라서 그의 행동을 뭐라 해야 할지 몰랐는데 최근 이런 용어를 알게 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사용할 일이 있는 건 좀 슬픈 일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딱 맞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행복이랄까.
최근 들어 가끔 떠올리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부분까지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가스라이팅 영역은 디테일하고 다양한 데다 표현방식도 풍부해서 가스라이팅하려고 따로 공부했나 싶을 정도다. 만날 때마다 하루에 2-3가지 종류의 가스라이팅을 했던 것 같다.
언젠가 그는 자신은 무조건 자기 여자는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난 일이 좋고 내가 하고 싶어서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일은 계속 할 거라고 했더니 그건 니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래퍼처럼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을 했는데 그 이유가 아버지가 경제력이 없어서, 무능한 아버지 대신해 돈 버느라 힘들어서 어머니가 힘들어서 그런 거 같다고, 그래서 자기 여자는 일 시키기 싫다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듯 말했다. 자기가 볼 땐, 100% 아버지의 무능한 경제력 때문이라고. 부부가 이혼하는 건 다 남자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 친구 부모님 속마음까지 알 수야 없지만 뭐랄까, 그의 단정적인 말투가 쎄했다. 정말 단순히 배우자의 무능력 때문이면 더 빨리 헤어지는 게 합리적인데, 아마도 그의 어머니는 그래도 자식 때문에 참고 미룬 게 아닐까 싶었다. 그의 어머니가 이혼 결심을 발표한 시기가 어쨌든 그의 누나와 그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밥벌이를 할 때였으니까.
남자 친구지만 남의 가정사에 차마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어서 어머니한테 무슨 이유 때문에 헤어지고 싶으신 거냐고 오빠가 직접 물어봤냐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냥 이제 너희 아버지랑 그만 살고 싶은 거지, 돈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는데 자기가 볼 때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한 것도 없다고,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어머닌 돈 때문에 아버지를 버리는 거라고 했다.
또, 그놈의 죽을죄, 죽을죄, 죽을죄.
30년 넘게 산 부부가 헤어진다면 그건 저렇게 딱 한마디로 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다. 차마 자식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하지 못한,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 꺼내지 못한 마음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가 죽을죄까지는 없는데 이혼을 당하는 거라며 모든 문제를 돈 때문인 것처럼 매도하다니. 돈이 없는 건 상황을 거들 뿐, 인간관계는 결국 사람이 문제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오빠, 아버지랑 비슷하다는 말 듣냐고. 원래 오랫동안 가치화되어 고착화된 생각의 패턴이 입 밖으로 ‘말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특히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은.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몰라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렇다고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이나 행동이 아버지랑 참 판박이라는 말, 많이 듣는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어머니가 왜 이혼을 결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 정말 잘하셨어요.
그녀의 환상이 몇 살 때쯤 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여자가 자신의 인생을 거의 다 갈아 넣고서야 깨닫게 된 삶의 진실을 외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남자와의 연애도 이렇게 싫은데 결혼은 얼마나 더 끔찍할까.
아마도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내가 받은 취급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무슨 일 앞에서도 사과하지 않는 바로 그 모습. 무슨 말만 하면 죽을죄 타령. 그 남자 친구와 헤어질 결심을 한 이유는 수십 가지지만 그냥 딱 떠오르는 걸 말하자면 한 줄 요약이 가능하긴 하다.
이런 인간과 같이 살기 싫다.
그의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깨어질 환상이었겠지만 그녀 덕분에 더 빨리, 선명하게 와장창 깨어졌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세상을 그의 어머니에게서 조금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