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 거'라면, 그건 '내 사유재산'입니다, 공공의 것이 아니에요
대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다음 수업까지 애매한 시간이라 과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안에서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싸운다고는 했지만 여자 목소리가 대부분이었고 훨씬 더 크고 화가 난 상태였다. 게다가 엄청 빠른 속도로 말하고 있었다.
과실은 컴퓨터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고 흑백이지만 프린터 사용도 가능해서 유용했다. 무엇보다 넓어서 편안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이 싸우고 있으니 들어가지 말아야 하나 싶었지만 과실이 아니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비치는 유리 틈으로 살짝 보니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고, 그 둘은 그 한가운데에서 지금 싸우는 게 할 일이라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내 이야기, 내 거라고요! 오빠가 그렇게 함부로 맘대로 써도 되는 게 아니라!
글자로 옮겨놓으니 그 당시에 비해 너무 차분하고 담담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정말 내가 본 그때의 분위기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해도, 여자아이는 누가 뺨이라도 때린 것처럼, 집에 불이라도 지른 것처럼, 바람피운 남자 친구 놈 닦달이라도 하듯, 아주 화가 난 미친년처럼 삿대질을 해가며 악을 쓰고 있었다.
-내 이야기 내 거예요! 내 거라고! 오빠 니가 뭔데, 내 이야기를 오빠 이름 걸고 쓰는 건데! 뭔데! 뭔데!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어쨌든 갈 곳이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그냥 들어갔다. 눈치를 보며 들어와 한 구석에서 내 잘못도 없는데 쫄아서 책을 보는 척하고 있는데 여자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사과해요. 나한테 사과해. 내 글 함부로 말도 없이 쓴 거, 지금 여기서 사과하고 그 이야기 안 쓰겠다고 말해요.
여자아이는 나보다 2학번인가 아래인 후배였고, 남자는 나보다 한 학번 위인 선배였지만 둘은 같은 학년이기도 했다.
그 전날, 두 사람을 포함해서 친한 사람 몇 명이서 술을 마시면서 이런 소재가 어떨까 저런 소재가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저 여자 후배가 어떤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반응이 그저 그랬는데 저 남자 선배만 괜찮다고 써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날이 시놉시스를 제출하는 날이었으므로 여자아이는 자신이 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시놉을 썼는데 남자 선배도 술자리에서 여자 후배가 말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시놉시스를 쓴 거였다.
교수님이 말했다.
-야, 누가 베낀 거냐? 너무 똑같은데? 동시에 같은 내용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뭐, 너네 둘이 사귀니?
그래서 수업 끝나고 여자애가 과실로 남자 선배를 불러 이야기 좀 하자고 한 상황이었다.
앞에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 과실은 긴 회의용 테이블만 달랑 하나 있는 다른 과 브레인스토밍 실과 달리 꽤 넓은 편이어서 아이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꽤 많은 우리 학과생들이 비는 시간에 pc방이나 당구장에 가지 않고 과실에서 자유롭게 컴퓨터를 이용하느라 그날도 사람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여자 후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화를 내는 가운데 이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여자아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진짜 말 그대로 폭포처럼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이미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어봐서 대충 알게 된 내용이었지만.
-선배, 미쳤어요? 어제 내가 했던 이야기라는 거, 같이 술 마신 사람들이 뻔-히 아는데 뻔뻔하게 어떻게 내가 창작한 걸 그-대로 써서, 그것도 같은 수업에서 발표할 생각을 해요? 양심이 없는 거예요, 머리가 없는 거예요?
싸울 만한 일이긴 하지만 여자아이가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고 멋있으면서도 왜 아무도 말리지 않나 싶어 상황설명을 해준 후배에게 왜 저렇게 싸우는데도 아무도 안 말리냐고 물었다.
-어떻게 말려요. 그리고 처음엔 싸우는 것도 아니었어요. 쟤가 처음부터 화내고 소리 지른 건 아니라서. 얘기하나 보다 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말릴 생각 안 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싸우고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여자 후배도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쓴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선배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허락을 구하지 않고 쓴 것은 인정했지만 사과할 일까지는 아니며, 아직 구성이나 기승전결이 제대로 갖추어진 이야기도 아니고, 이야기에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아닌데 니가 더 잘 써서 먼저 당선되면 그만이지, 자신이 그걸 안 쓸 생각은 없다고 했다는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여자아이의 꼭지가 돌았다.
그러니까 이야기 좀 하려던 게, 큰소리로 이어진 것은 지금 미친년처럼 보이는, 이 여자아이의 책임이 아니었다.
판을 크게 만든 건 그 선배의 행동과 그 이후에 이어진 태도였다. 그리고 그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침착했다.
-사과해요. 여기서.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내 이야기 함부로 허락도 맡지 않고 써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고, 지금 내가 말한 그대로 말하세요. 그러고 나서, 밖에 나가요. 안 그러면 여기서 못 나가요.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가 미안하다, 는 말을 끝내 하지 않고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언성이 높아진 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선배는 나가려고 했고 여자아이는 옷을 잡고 나가지 말라고 했고, 남자 선배는 니가 뭔데 지금 내 옷을 잡냐고 옷 놓으라고, 안 놓으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고 하고, 여자아이는 그러니까 사과하고 가시라고 하는,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었다. 내가 처음에 삿대질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아이의 팔의 움직임은 삿대질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사과하지 않고 도망가려는 그 선배를 붙잡는데 그가 계속 뿌리쳐서 그 바람에 그녀의 팔이 흔들리는 것을, 험악한 분위기라서 내가 정면에서 똑바로 보지 못 해서 그녀의 고함소리와 함께 듣느라 팔이 공중에서 흔들리는 것을, 삿대질로 인지한 것이었다.
잘못은 그 남자 선배가 했는데, 심지어 같이 술 마셨던 증인들까지 버젓이 있는데 이렇게 소리치고 매달려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해서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니. 아니,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데도 못 받고 있는 중이었다.
누군가 사과를 받기 위해 날뛰고 있다면 ‘왜 침착하고 차분하게 사과를 요구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은 접어두자. 그 사람도 처음엔 차분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사건의 전말도 건네 들은 데다 나는 안 친한 선배라서 끼어들 수가 없었다. 사실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생각을 하긴 했는데, 누가 됐든 나보고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것 같아서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수업시간이 다 되어서 편을 들어주지도 못하고, 싸움의 끝도 보지 못한 채 과실을 나와야 했다. 내가 전해 듣기론 결국 그녀는 사과를 받지 못하고 그를 보내줬다고 한다. 수업 못 듣고 너 때문에 학점 망치면 네가 책임질 거냐는 그의 협박 때문에.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까지 탐을 내고 소유권을 갖기 위해 죽도록 싸우나 싶어 수업을 들었다는 후배에게 물어보았다. 듣고 보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가 쓰려고 한 이야기니 자세한 내용을 여기에 쓰는 것도 무례일 수 있으니 대충 언급만 하자면, 이야기 내용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와 내용이 거의 같고, 다만 거기에 무협을 끼얹은 스타일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라는 건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라는 말이지만, 사실 따지자면 누군가가 소유권을 주장할 만큼 자신만의 창작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든, 이미 오랫동안 살아남을 정도로 그 매력을 획득한 전통적 서사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나에게 깨달음을 준 건 그 두 사람이 두고 싸운 ‘어떤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이야기는 내 것'이라는 그 아이의 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아직 이름표가 붙지 않은 것이라도 '내가 만든 것은 내 사유재산'이라는, 목숨이라도 걸고 싸우는 듯한 그녀의 태도.
-내 이야긴, 내 꺼라고요. 오빠가 마음대로 그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공공 소유물 아니라고.
이야기 자체는 별 게 아니더라도, 내가 만들고 그걸 내 입술로 말했다면 '내 이야기'인 것이고, 내가 겪은 일이라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내 이야기'이다.
‘내 이야기라면, 그건 내 사유재산'이니 남이 함부로 말하거나 쓰게 두지 않겠다는 태도.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기 이야기에 대해서는 안 물러섰으면 좋겠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돈 주고도 못 배울 태도를 그녀에게서 배워버렸나 보다.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이고 주변 사람들과 되도록 잘 지내려고 하지만, 진짜 싸워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의 그녀처럼, 주변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미친개처럼 싸운다. 고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