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의 보은
-... 저, 시은 씨 나가고 얼마 안 돼서 완전 미친년 취급받고 그만뒀어요.
오랜만에 카톡을 통해 안부를 묻던 지인이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그 지인은 내가 24살 때 환경단체에서 일할 때 함께 일하던 분이었다. 내가 그만두고 몇 달 뒤, 그분도 그만두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알지는 못했다.
환경 단체 일이 주말에도 갑작스레 일이 생기기도 하는 데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인 것에 비해 급여라고 할 만한 것도 안 되는 활동비를 받는 것이다 보니, 그냥 돈 때문이겠거니 했다. 내 기억으로 내가 수습기간 3개월간 내가 받은 돈은 한 달에 60만 원이었다. 수습기간을 채우고 받은 금액은 85만 원이었고. 한 마디로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꾸려갈 만한 수준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경제활동이 삶에 크게 의미가 없어도 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돈 얘기는 중요한 얘기이긴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다른 글에서 쓰긴 했지만 연합해서 활동하는 다른 환경단체의 유부남 활동가에게 성폭행당할 뻔하기도 했고(다행히 잘 도망쳐 나왔다) 그 이후에 내가 일하던 단체의 간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기도 해서 NGO 단체 자체에 오만 정이 떨어져 버렸다. 내부는 다 이 모양 이 꼴인가 싶어서.
간부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면, 이 일도 역사가 좀 있다.
일단 내가 입사한 환경 단체명은 <부산 녹색연합>이라는 곳인데 이 곳에 꽤 오래 근무했던 두 명의 활동가가 동시에 갑자기 그만두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띄운 공고를 보고, 마침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복학은 하기 싫어하며 매일 그 환경단체 사이트에 들락날락하던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그만둔다는 것은 보통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 사람이 힘들어서(정확히는 그 사람이 너무 싫어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도 그런 경우였다.
내가 입사하기 전, K라는 활동가와 L이라는 활동가, 그리고 나에게 안부를 물은 지인 세 사람이 함께 일했다.
K가 30살, L이 27살, 그리고 지인은 44살이었다. 정확히 무슨 법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환경보호를 위해 입법시키고자 오랫동안 노력한 법안이 통과가 되어 다 함께 축하하는 회식 자리였는데 대표위원장이 L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모두가 있는 좌식 회식 자리에서, 반바지를 입은 그녀의 드러난 허벅지를. L은 좀 내향적인 성격이고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K가 대신 불쾌감을 드러냈고, 이거 성추행이라고 언급을 했고 사과를 요구했다고 한다. L도 처음엔 사과받고 싶었지만 문제가 커지는 것 같아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아 덮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K는 계속해서 대표위원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고 한다. 대표위원장은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L은 불편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얼마 안가 2년 동안 일한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사실 이 과정에서 L과 K 사이도 서먹해졌다고 한다. K는 L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화내고 분노해서 자신이 받은 성추행에 대해 사과를 받으려고 노력하길 바라서 그녀를 푸시했고, L은 사과는 둘째치고 이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자신을 몰아붙이듯이 꼭 사과를 받아내라고 하는 K가 살짝 부담스럽고 껄끄러워서 말이다.
K 또한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K는 3년간 일한 퇴직금을 단체에 요구했는데 단체 측에서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주변에 소문나게 한 ‘재수 없는 짓’을 하여 단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퇴직금을 줄 수 없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K가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해서 대표위원들이 대표위원장님은 ‘그럴 의도가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한편, 노동부에 많은 사람들이 가서 여러 가지 조사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가끔 K의 이름이 나오면, 몇몇 위원들은 일은 똑 부러지게 잘했다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쨌든 막판에 사람이 미친 것처럼 군 게 불쾌해서 3년간의 퇴직금을 끝내 안 줬다고 한다.
주변 환경단체에도 이 일은 소문이 났지만 늘 그렇듯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게 된, 내가 들어오게 된 배경이었다. 그 일 이후, 대표위원장은 대표위원으로 강등이 되었다. 사실 이 두 직위가 큰 차이는 없지만.
그리고, 나 역시 두 사람을 그만두게 한 '그 사람' 덕분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들어간 지 몇 달 후에 다른 소규모 단체들도 함께 회식을 할 일이 있었다.
아주 추운 겨울은 아니었지만 아우터를 입어야 할 정도로는 쌀쌀한 날씨였고 나는 그날 인터넷에서 산 두껍지 않고 루즈한 핏의 와인색 후드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화장실 가기 편한 자리 같아 보여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대표위원 옆에 앉으려 하자 손사래를 치며, 자신 옆에는 이제 여자들이 안 앉았으면 좋겠다고, 이제 오해 살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내가 예전에 들었던 일은 오해가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잠깐 했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나는 술을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이었는데 그날도 화장실을 자주 갔다. 내가 앉은 위치와 대표위원의 위치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 그 대표위원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나를 보며 빤히 이렇게 말했다.
-이제 보니 OO활동가는 살 좀 빼야겠다. 배가 많이 나왔네.
그 대표위원의 피지컬은 트럼프 같은 체형이었다. 190cm에 110-120kg은 충분히 나갈 거구의 배 나온 남자.
나는 루즈한 핏의 상의를 입고 있었고, 그 옷을 입을 때면 엄마나 친구들도 배가 하나도 안 나와 보인다고 여리여리해 보인다고 하던 마법 같은 옷이었다. 사실 그 당시 스트레스로 배가 나오긴 했지만 배가 나온 걸 알 수 있는 상의가 절대 아니었다. 그가 내 몸을 지적했다는 사실보다, 살찐 걸 지적당한 게 너무 창피해서 나는 바로 강하게 부정했다.
-아닌데요. 저 배 안 나왔어요.
-에이, 뭘 거짓말하고 그래. 배 나왔잖아. 내가 딱 보면 아는데. OO활동가, 62kg이지?
-저 그렇게 몸무게 많이 안 나가는데요, 58,9 kg 정도밖에 안 나가는데,
라고 더 말하려 하자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오늘 집에 가서 재봐, 내가 자세하게 봐서 정확해. 뱃살 좀 꼭 빼고.
왜, 니가 내 몸을 자세하게 보고, 왜 내가 살을 빼서 니 시각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성폭행당할 뻔한 날보다 이 날이 더 불쾌했다. 누가 누굴 지적해. 늙고 못생기고 뚱뚱한 주제에. 성폭행당할 뻔한 날은 무서웠던 거고 이 날은 무서운 건 아니고 단순히 불쾌한 건가? 여하튼 이 날이 훨씬 더 불쾌했다.
환경운동이라는 게, 아무리 해도 바뀌는 게 정말 거의 없다. 매일 잡무나 하며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돈 받으면서도 그래도 순수한 마음에 환경에 도움되는 일 뭐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성폭행(다행히 미수로 끝났지만), 성추행 2콤보를 겪고 나니 오만 정이 떨어졌다. 그 대표위원이 꼴 보기 싫은 게 가장 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복학하겠다는 핑계로 그만뒀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만두셨어요?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그녀가 대답했다.
-예전에 그 성추행 사건, 그 얘기가 나왔거든. 사실 그때 내가 나이는 많지만 들어온 지 한 두 달 밖에 안 된 사람이라 이 곳 분위기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당시에 한 건 없었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50대 후반 남자가 20대 여자 허벅지에 손을 얹은 거, 여자 입장에서 당연히 불쾌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나가긴 했지만 사실 그 일은 위원님이 잘못한 게 맞다고, 특히 어린 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일이고 K 씨가 좀 세게 말한 부분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K 씨 말대로 L씨한테 제대로 사과하셨어야 하는 게 맞는 일 같다고요. 사실 그 나잇대 남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배운 게 뭐가 있고 아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위원님 나잇대 사람들은 예전에 그게 문제가 아닌 시대를 살았다 쳐도 지금은 상대방이 불쾌해하면, 별 거 아니라고 넘어갈 게 아니라 사과해야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좀 다다다다! 말했죠. 알잖아요. 저 급하면 말 엄청 급하게 하고 또, 속에 있는 말 다 해버리는 거. 그러니까 그 대표위원 그러더라고요. 26, 7살이 뭐가 어리냐고. 그랬더니 저보고 지난 안 좋은 일 꺼내서 어쩌자는 거냐고 해서, 내가 지난 일이라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솔직히 거기서 그냥 보고만 계셨던 분들도 방관자라고, 다른 위원님들도 아무 책임 없는 건 아니라고 했더니 그년들이 미친년들이었던 건데 저보고 미친년 편드는 거냐는 거예요. 그러더니 미친 것 같다는 거예요. 동지애를 가진 사람끼리 감격에 겨우면 좀 그럴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아주 오지게 물고 뜯는다고.
저 말을 듣는 순간, 아 빨리 나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거기 있는 동안에도 불쾌한 일이 드문드문 있긴 있었는데 내가 겪은 건 대환장파티의 서막에 불과했던 거다. 거기 있던 다른 위원들은 50대 또래끼리 방관할 맛 나겠다. 자신들이 방관자였다는 걸 공격하는 누군가를, 서울대를 나와 번듯한 치과의사로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인맥 좋은 중년의 남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격해주니 말이다. 그 맛에 다 같이 방관하는 걸까.
그나저나 감격받은 걸 스스로 해결 못 한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는데. 풍이 와서 거동을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도움을 받아 이동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감격해서 동지끼리 허벅지 좀 쓰다듬었단다. 지 허벅지 놔두고.
딸 같아서 만졌다, 의 색다른 버전인가?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 및 의사전달에 문제가 없는 인간이 감격적인 일 있을 때마다 눈 앞에 있는 여자 허벅지를 통해 스킨십을 해야만 자신의 감정이 표현 가능하다는 게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모자란 놈이면 아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할 텐데, 서면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름 내건 치과에서 사람들 진료하며 잘 살고 있다니 믿기 싫다.
게다가 의료인 면허는 성폭행 신고돼도 취소되지 않으니 이 정도 일로는 끄덕없어서 아마 말년까지 행복하게 잘 살 것 같다. 여러 사람 미친년, 재수 없는 년 만들면서 스스로는 행복하고 부유하게, 지역 환경운동가로 명망도 쌓아가며.
-... 내가 미친년이라고 말한 거 취소하라니까, 자기는 잘못 없대요. 그리고 그다음 날 다른 남자 위원이 와서 그 대표위원한테 사과하라고 하더라고요.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한테 대든 건 잘못한 거라고. 안 한다고 했죠. 그러더니 단체로 갈구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버티다 버티다 그만뒀죠...
이런 게 바로 방관자의 보은인가 보다. 50대 후반 남자가 26,7살 여자 보고 별로 안 어리다고 후려치기 할 때는 가만있던 사람들이 이럴 때는 또 44살 여자한테는 또 어린 사람이 잘못했으니 사과하라니.
나만 그들과 트러블 없이 멀쩡한 인간인 채로 나왔는데, 하나도 자랑스럽지가 않다.